김한민 |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역병과 싸우는 유일한 방편은 정직성이다.”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우리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고 느끼는데, 사망자 수 때문이 아니라 정직함의 부족 때문이다. 지적 정직성은 나의 무지와 다른 생각에 열려 있을 때 생기고, 입장에 집착하면 사라진다. 일찍이 방역에 비판적이면 ‘반정부 우파 음모론’ ‘안티백서’로 낙인찍을 때부터 토론의 싹은 잘렸다. 방역 지지자는 조치들의 제 문제를 외면하고, 반대자는 그 효과·불가피성을 부정한다. 각자 유리한 정보만 퍼나르고, 불리한 정보엔 침묵하고, 생각이 다르면 차단하며 마치 선거 치르듯 코로나를 치르고 있다. (나처럼) 어느 ‘편’에도 안 속하면서 접종받고 지킬 걸 지켜도, 비판을 하는 순간 반과학·유언비어 유포로 몰릴 만큼 흑백논리가 잠식했다.
코로나19의 위험은 엄존한다. 다만 치명률이 독감보다 높고 메르스보다 낮은 애매한 위치에 있기에 상이한 해석을 양산한다. 기후변화처럼 오랜 데이터가 축적돼 과학적 합의가 99%에 달하는 이슈조차 (관련 강경 대응이 없어도) 부인론이 많은데, 2년밖에 안 된데다 초강경 조치까지 취해진 코로나 사태에 이견이 많은 건 당연하다. 초강경이 아니라고? 집회·결사·이동의 헌법상 기본권 제한, 의료인력·소상공인의 무한 희생, 사적 정보 열람, 소셜미디어 검열, 교육의 파행, 아이들의 마스크 및 접종 의무화, 임산부도 예외 없는 방역패스, 비대면 임종에 관도 못 만지는 장례… 인간 존엄성과 생존의 의미까지 되묻게 만드는 이 모든 조치들의 근거는 과학일까, 관성화된 공포일까? 이젠 명백히 현존하는 위험 없이도 잠재성만으로 고강도 규제가 가능함을 오미크론 대응이 보여줬다. 만약 2019년쯤 신종 감염병이 등장해 전세계에 한달간 한 자릿수 사망자를 냈다면 이런 조치는 불가능했으리라. “선이란 몇번 넘으면 영원히 사라진다”는 영화 <레인메이커>의 대사처럼 기준선이 자꾸만 물러난다. 3차 접종이 의무면 10차까지 못 갈 이유가 있나? 이보다 ‘센 놈이 뜨면’, 가령 기후위기엔 더 희생할 텐가? 아니면 그땐 되레 반대론이 득세할까? 실제로 기후 관련 조치는 작은 것도 개인·기업 권리침해라며 반발이 거세다.
장기전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필요한 건 열린 토론이다. 공공의료 확대처럼 공감대 큰 것부터 백신처럼 논쟁적 주제까지 정직하게 묻고 답하기: 이 시점의 백신은 해결사인가, 유용한 도구 중 하나(감·전염보다 중증화 억제에 효과적인)인가? 그 위상에 맞는 정도와 방식으로 도입되고 있나? 역병의 지속을 비접종자 탓이라 단정한다면, 약의 불완전함을 복용 안 한 사람 책임으로 전가하는 셈 아닐까? 정말 완성도 높은 백신이라면 부스터가 아니라 1차 접종도 못 한 국가에 양보하는 게 급선무 아닐까? 공공지원을 받은 백신회사의 특허 폭리, 각국과 맺는 비밀·불공정 계약, 부실한 임상시험을 두고만 볼 건가? 돌파감염(회복)자의 면역력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맞는다면 ‘위드 코로나’는 불가피하지 않나? 백신 접종 후 사망의 인과성을 입증하는 엄격함을 코로나 사망에도 적용하는가? 방역 장기화로 자살하는 이들의 죽음은 도외시되지 않나? 정책 자문에 응하는 전문가들의 득실 판단이 전문 분야 너머로 과잉 대표되고 있진 않나? 기본권과 건강 주권 침해는 위험한 선례로 남지 않을까? 팬데믹의 근본 원인인 산림 파괴와 동물 거래를 막는 노력은 하나라도 했나? 밀집 지역이 아닌 실외에서 마스크 착용은 왜 하나? 시민끼리 경계·감시·신고하는 사회는 살 만한가? 결국 “일시적 안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사회는 안전과 자유 둘 다 잃는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경고처럼 돼가고 있진 않나? 이런 질문 앞에 정직해질 때 비로소 우리의 잃어버린 균형감각이 객관화된다. 그것부터 회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