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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가브리엘 보리치의 언어 칵테일

등록 2021-12-29 16:04수정 2021-12-30 02:31

지난 19일(현지시간) 치러진 칠레 대선에서 35살의 젊은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극우 성향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신화 연합뉴스
지난 19일(현지시간) 치러진 칠레 대선에서 35살의 젊은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극우 성향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신화 연합뉴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지난 19일(현지시간) 칠레는 56%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 35살의 진보적 학생운동가 출신 가브리엘 보리치를 새 대통령으로 뽑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젊은 지도자, 세계 195개 독립국가 중 7번째 30대 지도자가 등장했다. 그는 그동안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반대되는, 빈부격차 축소, 사회적 소수자 인권 강화, 독재 시대 잔재 청산, 기후변화 정책을 약속했다.

보리치는 스페인어로 당선 인사를 했지만 시작은 선주민 언어 마푸체어였다. 칠레의 총인구 1900만명 중 선주민 인구는 약 200만명이다. 그 가운데 그래도 마푸체족이 170만명으로 제일 많고, 마푸체어를 쓰는 이들은 약 25만명 안팎이다. 나머지는 마푸체어를 이미 상실한 채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인사는 보수 정권으로 인해 그동안 사회적으로 외면받았던 마푸체족에 대한 배려이자 선주민 모두의 사회적 위상과 인권을 개선하려는 관심을 뜻한다.

보리치 당선자는 중산층 화이트칼라인 크로아티아계 아버지와 스페인 카탈루냐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랐다. 칠레는 아메리카 대륙 국가 가운데 유럽 이민자가 많은 나라 중 하나다. 남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북미 미국과 캐나다와 비슷하다. 이들 나라의 이민자들은 자신의 언어 대신 이민 가려는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했던 국가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언어적인 공통점이 있다. 미국 이민자들은 영어, 브라질 이민자들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칠레 이민자들은 스페인어를 주로 사용한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지도자로 나선 이들은 선주민의 언어나 조상의 언어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짤막한 인사말 몇마디였지만 보리치가 중요한 순간에 마푸체어로 인사를 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보리치 당선자가 태어나 자란 칠레의 맨 끝 항구도시인 푼타아레나스에서 그는 이른바 ‘영국 학교’를 다녔다. 20세기 초 영국 기업가와 이민자 자녀를 위해 설립한 학교였고, 원래는 영어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영국인이 줄어들면서 스페인어로 전환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 학교의 영어 교육은 유명하고, 2000년대 후반에는 국제 바칼로레아 과정 도입으로 더 유명해졌다. 보리치가 학교를 다닐 당시 교장은 다 영국계였다. 유튜브에서 만난 보리치는 유창한 영어로 학술 세미나 발표도 하고, 질의응답도 소화했다.

보리치 당선자의 이런 언어 칵테일은 흥미롭다. 그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영어에도 능통하며 마푸체어에 대한 관심도 잊지 않는다. 선거 기간 청각장애인과 소통하고자 수화로 홍보 비디오를 만들고, 능숙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인사도 한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회적 약자를 이용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의 정치적 노선에 잘 어울리는 행위로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한 진지함도 느껴진다. 이런 그의 생각과 말은 이미 칠레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그 결과 그는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다. 앞으로 정책의 실천 정도는 곧 보리치의 정치적 성공을 좌우할 것이다.

그는 ‘글로벌 영어’ 세대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그 산물인 글로벌화의 언어는 영어가 되었다. 1990년대 영어는 영국이나 미국 같은 ‘영어권’을 초월해 ‘글로벌 영어’로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졌고 칠레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영어 실력이 곧 사회적 성공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1990년대, 보리치가 한창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당시, 신자유주의를 열심히 도입한 대한민국에서 토익 열풍과 기러기 아빠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월은 흘러 ‘글로벌 영어’ 시대에 교육받은 이들이 지도자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한국도 그럴 것이다. 이들은 진보와 보수의 색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 사회적 자본으로 가치가 높은 ‘글로벌 영어’를 배운 세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세대에 영어는 특정한 나라 또는 문화권이 사용하는 언어라기보다 필수 과목이면서 사회에 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스펙이다. 그러면서 칠레처럼 ‘글로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사회계층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영어 격차’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들이 선택할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 보리치 당선자처럼 ‘글로벌 영어’가 상징하는 신자유주의의 단점을 해결하는 쪽으로 나아갈까? 그 신화를 따라 이전의 정책을 되풀이할까? 우리의 새해는 어떤 시대의 첫 시작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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