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진호 | 한동대 교수(창의융합교육원)
한국 사회를 달구는 핫이슈 중 하나는 공정이다. 선거철만 되면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대선 후보마다 입만 열면 공정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공정과 거리가 멀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식상해 있다. 그러나 이 이슈를 또 꺼내 들어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가 합해진 단어다. 나는 학기 초에 대학생들에게 공정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어떤 개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물어본다. 대다수의 학생이 경쟁에서의 공평함이라고 답한다. 출발선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 학생들이 미래의 일자리 문제를 두고 무한경쟁 시대에 내몰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반면, 서구 청년들은 정의로운 재판이라고 답한다. 죄지은 자를 벌주되, 재판에서 억울한 자가 없도록 하는 것이 공정의 첫걸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법조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불신은 심각하다.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가를 잡아 처형하고, 친일 세력의 배를 불리던 악습을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촛불정부가 들어설 때 내걸었던, ‘적폐청산 검찰개혁’의 구호가 처음엔 먹혀들었다. 그러나 이번 정부에서도 불공정 관련 사건들이 터지면서 젊은이들은 이제 희망을 접은 듯하다. 청년들에게 검찰개혁은 남의 일이지만, 일자리 문제의 불평등은 눈앞의 일인 것이다.
공정의 의미가 위의 두가지밖에 없을까? 둘 중에 하나를 취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아니다. 공평한 경쟁도 중요하고 정의로운 재판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합리적 분배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투명한 과정이 있어야 진정한 공정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공정사회를 원하기 전에 공정을 제대로 알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
공정의 한 단면을 잘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예화가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구하기 위해 노무시장에 새벽같이 나가서 일당을 약속하고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을 시켰다. 일꾼이 부족하자 그는 수시로 시장에 나가 일꾼들을 더 고용했다. 그런데 오후 다섯시가 되어서도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은 왜 하루 종일 여기서 놀고 있소?”라고 질문하니, “아무도 우리를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포도원 주인은 이를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도 일을 준다. 일당을 지급할 때, 해 질 무렵에 들어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당이 지급되는 것을 본 일찍 들어와 더 많은 일을 한 일꾼들이 화를 낸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이들에게도 너희와 똑같은 일당을 주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답하며, “내가 선한 일을 베푸는데 어째서 너희가 나를 악하게 보느냐”고 반문한다.
사회에는 일자리를 구하지만 아무도 써주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장애인과 노인, 난민, 청년 미취업자 등)이 존재한다. 그들을 무한경쟁 속에 밀어 넣어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복지사회로 가는 것이 곧 공정사회로 가는 길임을 알고 가르쳐야 한다. 유대인들은 포도원 주인의 정신, 즉 공정의 가치를 어려서부터 가르친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명하는 유대인의 공의, ‘체다카’라는 단어는 헌금함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자들이 기부를 가장 많이 하는 민족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불교의 자비와 보시의 정신과도 상통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공정의 이슈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모두가 공정을 말하고 공정을 원하지만, 정작 공정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가 공정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내년 대선을 위해 뛰고 있는 대선 후보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하고 싶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공정의 의미가 무엇인가? 정말 대한민국이 공정해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공정을 공정케 하라. 새해에는 공정을 바로 가르치고 행하는 차기 대통령이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