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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국가범죄, 판례로 말하라

등록 2006-02-19 18:36

김회승 논설위원
김회승 논설위원
아침햇발
최종길 교수의 유족들이 국가 배상 판결을 받았다. 중앙정보부 남산 청사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지 33년, 가톨릭 사제단이 그의 죽음을 신원한 지 18년 만이다. 유신독재가 조작·은폐한 ‘의문사 1호’가 한 세대가 흘러서야 진실의 물꼬를 찾은 셈이다.

이번 판결은 반인도적 국가범죄에 대한 몇가지 뚜렷한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재판부는 ‘세월과의 싸움’에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이른바 소멸시효 문제다. 1심에선 사제단의 진정(1988년) 이후에는 소송 제기의 장애가 사라졌다고 봤지만, 항소심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고문치사’ 발표(2002년) 시점을 기준으로 시효를 판단했다. 둘째, 시효 소멸을 내세운 국가의 항변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권력의 불법행위가 있었는지는 불문에 부친 채 시효가 완성됐으니 배상 책임이 없다는 논리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민법상 대원칙을 적용했다.

셋째, 실체적 진실에서는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였다. 의문사위는 엄연한 국가기관이지만, 법원은 무죄의 증거는커녕 재심 요건으로 인정하는 것도 인색했다. 넷째,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국제 규범을 전향적으로 수용했다. 정치적·시민적 권리에 관한 규약이 정한 반인권 범죄에 대한 시효 배제 원칙을 인용했다. ‘국가는 고문 등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를 처벌하지 않는 법률을 폐기하라’는 유엔 선언문의 정신을 살렸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법적 심판 이상의 의미와 과제를 우리 사회에 던졌다. 그동안 거창 양민학살, 삼청교육대, 녹화사업 등 숱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번번이 소멸시효의 문턱에 걸려 좌절했다. 본디 오랜 기간 행사하지 않는 권리는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게 시효제도의 취지다. 그러나 국가범죄의 실체적 진실은 조직적인 은폐·조작으로 가려졌고, 피해자의 한맺힌 절규는 철저히 봉쇄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권력기관은 시효의 우산 속으로 숨고, 사법부는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면죄부를 줬다.

입법기관인 국회는 이런 법률적 부조리를 줄곧 방치했다. 국가범죄의 시효 배제 여론이 거세지면 입법안을 만들지만 흉내뿐이다. 지금도 정부·여당은 관련 법안을 논의 중이지만 입법안부터가 신통치 않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처벌할 수 없더라도 피해를 봤다면 국가가 배상하겠다는 식이다. 그나마 법치주의 근간을 뒤흔든다며 핏발을 세울 이들이 적지 않을 터이니 갈 길이 한참 멀다.

이번 판결은 항소심이다. 대법원의 판단이 남아 있다. 만약 가해 기관이 책임을 인정한다면 피해자의 승소 판결에 항소나 상고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실제 수지 김 사건 때 법무부는 유족의 고통을 연장시킬 수 없고 국가기관의 불법행위가 재발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항소를 포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최 교수의 유족들은 재판부의 화해권고나 강제조정에 따른 보상 제안을 2차례나 거부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했다. 진실규명 없는 어정쩡한 보상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정당한 배상을 받고자 함이었다.

법원 판결의 규범은 대법원 판례다. 이번 판결이 법 정책적 상고를 통해 전향적인 판례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과연 소멸시효에 근거한 국가의 항변권은 타당한지, 다른 국가기관 조사의 증거능력을 인정할지, 합리적인 시효 기산점은 어떻게 판단할지 등에 관해 합리적인 판결의 전통을 보고 싶다. 지금도 많은 국가범죄 피해자들이 사법 정의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지 않은가.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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