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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2022년, 몽진과 파천 / 안영춘

등록 2022-03-23 15:25수정 2022-03-24 02:31

같은 뜻을 지닌 몽진(蒙塵)과 파천(播遷)은 고귀하면서도 누추한 표현이다. 오직 임금에게만 쓸 수 있지만, 궁을 버리고 몸을 피할 수밖에 없는 딱한 행위를 이른다. 몽진은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의 시성 두보의 ‘춘망’(春望)에 나온다. 제아무리 임금이라도 피난길에는 먼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몽진에는 시적 파토스가 서려 있다.

‘임금이 자리를 옮긴다’는 뜻의 파천은 상대적으로 덤덤하다. 하지만 실상은 한층 누추하다. 1896년 2월11일 이른 아침 궁녀 교자(가마) 두대가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갔다. 한대에 둘씩 ‘합승’하고 있었다. 교자는 1㎞ 남짓 떨어진 러시아공사관 앞에 멈춰섰다. 상궁 옷차림의 네 사람이 내렸다. 하지만 그중 둘은 여장 남자. 고종과 세자였다. 한해 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을 겪은 고종은 친러파의 부추김에 ‘아관파천’을 감행했다.

고종에 앞서 몽진했던 조선 임금으로 선조와 인조가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줄행랑쳤고, 인조는 이괄의 난부터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세차례나 먼짓길로 나섰다. 개중 고종의 파천이 도드라진다. 적군이 눈앞에 닥친 것도 아닌데 신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궁녀 가마에 올랐다. 일본이 ‘체면’을 강조하며 환궁을 요구했으나, “불안과 공포가 도사린 궁보다 노국공관의 일실(一室 )이 안정하다 ”며 버텼다.

1년하고 9일을 농성하듯 머물던 고종은 안팎의 압력에 밀려 1897년 2월25일 러시아공사관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정궁(경복궁)이 아니라 러시아공사관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덕수궁이었다. 당시 이름은 ‘경운궁’. 말이 궁이지, 정치적 위상은 러시아공사관의 부속건물이었던 셈이다. 실제로는 애초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임시로 머문 행궁이었다.

윤석열 당선자가 위풍당당하게 대통령실을 국방부로 이전하겠다는데도 몽진과 파천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건 그에게서 황망히 짐을 꾸리던 조선 임금들의 조바심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레토릭 말고는 눈 씻고 봐도 화급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막무가내 무리수를 두는 데서는 고종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통의동 당선자 집무실은 노국공관의 일실, 청와대 지하벙커는 덕수궁의 환유 같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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