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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뭇 생명의 소중함

등록 2006-02-20 18:51수정 2006-02-20 18:54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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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칼럼
아침에 문을 열고 뜨락에 나서니 마당 옆 비탈에 있던 고라니 두 마리가 달아난다. 잡목림 사이를 뛰어가는 고라니들을 향해 휘어진 휘파람을 불며 손을 천천히 흔들었더니 한 마리가 가다 말고 서서 귀를 쫑긋하고 바라본다. 귀를 앞뒤로 움직이며 사람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의 의미를 기억해 두려는 것 같다. 소한 대한 추위도 견디고 폭설도 이겨냈으니 봄을 기다리는 고라니의 마음이 한결 가벼울 것 같다.

우수가 지나면서 쌍암지의 얼음도 거의 다 녹았다. 아직 다 녹지 않은 얼음의 차고 매끄러운 곡선을 쓰다듬으며 연분홍 아침 햇살이 물 위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내가 기거하는 산방의 연못물도 천천히 철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 얼음 밑에서 겨울 석 달을 지낸 수련은 봄에 잎을 푸르게 키우고 여름에 삶은 달걀속처럼 흰 바탕에 노란 꽃을 피우리라. 그 수련꽃을 보며 ‘자기 마음의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을 기억하는 이도 있으리라. 수련 줄기와 뿌리 근처에서 겨울을 지낸 산개구리알과 도롱뇽알도 경칩이 지나면 미세한 움직임을 시작할 것이다.

땅 위에 사는 나는 수도가 얼고 펌프의 모터가 동파되고 보일러가 고장나고 온수기가 터질 때마다 전전긍긍하며 겨울을 보냈는데, 얼음장 밑에서, 땅속에서, 차고 음습한 굴에서, 모두들 조용히 자기 생명의 중심을 지켜가는 풀과 나무와 산짐승과 미물들의 동안거는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그까짓 도롱뇽 때문에 목숨을 걸고 단식하기를 밥 먹듯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목숨의 크기는 사람의 것이 가장 큰 것만은 아니다. 해월 선생은 ‘물물천 사사천’(物物天 事事天)이라 했다. 사물 하나하나마다 다 하늘이요, 일마다 하늘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만 하느님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안에는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스쿼미시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편지도 맥락이 같은 말이다.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요,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가족이다. 시내와 강을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피다. 강은 우리의 형제다.” 모든 사물은 우리 몸을 연결하는 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物吾同胞)는 이 말은 우주적 대가족주의를 지향한다. ‘물오동포’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한배에서 태어난 한몸, 한형제로 보는 것이다.

나도 지난 시절 단식으로 저항하는 일을 해 보았다. 예비단식까지 합쳐 기껏 십여 일 단식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간 적이 있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생각하며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리던 기억이 있다. 그때 우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주 단식을 하였다. 그러나 지율 스님의 단식은 사람과 사물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단식이라는 점에서 근본과 출발이 다르다.

물론 생태적 근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사물의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바탕이 다른 것들도 소중히 여기고 서로 성장 발전할 수 있도록 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야 인간도 소중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찮아 보이는 미물 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경물(敬物)의 마음을 가져야 사람을 받들고(경인), 그러면 자연히 하늘 받드는(경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도종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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