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3 17:25
수정 : 2005.02.13 17:25
가끔 귀국하여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 필자는 적지 않은 이질감을 느낀다. 왜 그리도 양복 정장 입은 사람들이 많은지, 남성들은 하나같이 철저하게 면도하여 수염 키우는 사람이 드문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회사원·관료들은 근무 시간에 양복 정장을 입는데 양복의 본고장인 구미에서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평상복을 입거나 넥타이는 안 매는 곳 등 복장 규칙이 훨씬 덜 엄격하다. 대학 교수들에게 강의할 때 상체와 목을 조이는 정장·넥타이를 강요하는 경우를 여태까지 외국의 어느 학교에서도 본 일이 없었다. 필자가 가본 대다수의 나라에서 수염을 기르는 일은 기업체든 누구든 무어라 할 수 없는 개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양복 정장이 마치 샐러리맨의 제복처럼 되어 있고 수염 없는 ‘단정한’ 외모가 정상적인 남성의 필수조건인 양 인식되어 있어 개체의 겉모습은 전체의 눈치를 봐야 한다. 활동하기 편하게 얼마든지 현대적으로 개량될 수 있는 한복과 같은 훌륭한 복장이 있는 나라에서 하필이면 심신을 고문하는 듯한 뻑뻑한 양복 정장·넥타이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 양복 정장을 입고 ‘깨끗이’ 면도한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뭘 뜻해왔는가?
개화기에 양복 착용은 소수 관료나 민간 개화파, 외국인의 특권적 위치의 상징이었다. 문관들에게 의례복으로 일본식 양복을 입으라고 명한 고종의 1900년 4월17일자 칙령 제14호는 양복 정장 권력화의 시초였다. 일제시대에도 양복 정장을 입고 수염을 다 깎거나 유럽·일본의 유행대로 카이저 콧수염만 기르는 것은 일본인이나 소수 상류층의 표시였다. 그러다 남한에서는 양복 정장차림·면도가 시골사람에 비해 우월하다는 도시인을 상징하게 됐고,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에 비해 우월한 화이트칼라라는 ‘중산층의 제복’이란 의미를 갖게 됐다. 이 제복은 학교와 군대라는 억압기제를 통해서 중산층들에게 얼마든지 강요할 수 있었다. 1987년의 시민혁명을 완료시키지 못하고 오늘에 와서야 천천히 문화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들은 국가·자본에 대한 예속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 때 교문 앞 복장검사에서 ‘불량’으로 걸려 엎드려뻗쳐, 원산폭격, 교실까지 오리걸음 등 인격을 파괴하는 처벌을 받고 군에서도 면도를 당연히 해야 하는 걸로 습득하고 나면, 그후 공무원 조직·기업체에서 일률적인 복장 문화에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옷을 ‘제멋대로’ 입거나 외모가 ‘단정’하지 못한 사람을 자기도 모르게 ‘괴짜’ ‘튀는 놈’ ‘뭔가 못 믿을 자’ ‘군기 빠진 이’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복장과 외모의 규칙을 체화하게 되면 일상적인 권위주의의 또 다른 담론과 행동방식들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끔 된다. 그것이야말로 양복 정장을 ‘주류’ 사회의 제복으로 만든 지배층이 원하는 바이다.
2003년 봄, 한 국회의원이 평상복 차림으로 등원하다 보수적인 동료들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 사건이 우연이었을까? 권력을 상징하는 국회에서 자연스런 평상복이 보이고 권위를 상징하는 교수들이 반바지를 입은 채 강의할 수 있다면 이는 병영사회 체제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복종 문화’를 성역으로 여기는 사회의 ‘상전’들은 결코 바라는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의상이나 외모가 내면적인 ‘나’의 표현인 만큼 의상과 외모의 균일화는 집단에의 무조건 항복과 함몰을 가장 강력하게 상징한다. 사회 전체의 목을 죄는 보이지 않는 선도부의 손, 내면화된 ‘용의검사’의 정신을 우리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미시적, 일상적 차원까지 미치기 위해서 무엇보다 병영사회의 망령을 벗어나는 일이 열쇠가 될 수 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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