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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영문 모를 죽음들 앞에서

등록 2022-04-10 18:03수정 2022-04-11 02:07

권영란 | 진주 <지역쓰담> 대표

소정골 학살 현장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금세 숨이 턱에 차도록 급경사이다. 산길 초입 벚나무 꽃잎은 이맘때면 봄눈처럼 분분히 흩날린다. 학살의 그날 수백명의 사람들은 무차별 난사에 비명도 내뱉지 못하고 저렇게 흩날리듯 스러졌을 게다. 지리산 외공 민간인학살 사건은 발생 후 71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지리산 외공 민간인학살은 1951년 2월20~25일 사이 장갑차와 군용 트럭을 탄 국군이 11대의 버스에 민간인 500여명을 태워 온 뒤 외공마을 뒷산 소정골짜기에서 집단학살하고 매장한 사건이다. 1960년 언론 보도에 의해 최초 세상에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국가도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역사였다. 2000년 지역 방송사와 시민사회단체가 첫 발굴 작업을 했는데 당시 참관한 서봉석(지리산 외공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씨의 증언에 따르면 첫번째 매장 구덩이를 파내자 금세 유골 150여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고 다시 덮었다 한다.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골 250여구를 추가 발굴해 세종시 추모의 집에 봉안 중이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군인들은 뒤로 손이 묶인 사람들을 구덩이에 꿇어앉혀 쏴 죽였다. 학살 매장지는 원래 주민들이 숯을 굽던 숯굴이었으며 전부 여섯 구덩이였다. 매장지 발굴에서 국군이 쓰던 카빈소총 탄피 80여개가 발견되고 은비녀와 도장, 교복 단추 등이 나왔지만 다른 학살 현장보다 목격자 확보가 어려웠다. 현지 경찰이나 주민을 동원하지 않고 아주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했던 것으로 보였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실규명 불능’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고 더 이상의 진상규명 작업은 없었다. 분명 국군이 가해자였고, 집단학살이 확인됐지만 희생자의 신원을 알 길 없고 유족이 없다는 몇가지 이유를 들어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다. 사실상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영문 모르는 죽음들’을 달래는 것은 경남지역 주민들이다. 해마다 4월이면 위령제를 지낸다. ‘지리산 외공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이름으로 지내는 위령제가 스무해를 훌쩍 넘겼다. 가해자도 희생자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탓에 다소 특별하다. 지리산 외공위령제에는 유족 한명 없다. 국가 지원금 전혀 없이 십시일반해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준비로 이뤄진다.

올해 위령제는 지난 9일 학살 현장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 있었다. 20여명이 모여들었고 소박하게나마 상을 차리고 제를 지냈다. 봉분도 빗돌도 없는 무덤에 헌화를 하던 여성 농민은 “외공리 소정골에서 학살된 사람들도, ‘좋은 곳에 가자’는 말에 꾀여 버스 타고 여기까지 왔을 것 같네요. 수학여행 가다가 참사를 당한 세월호 아이들처럼 말입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진실규명 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건 국가가 해야 할 일인데 나서지를 않는다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2014년 4월 위령제를 지내고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에 세월호는 계속 침몰하고 있었다. 몇몇은 집단학살이라며 분노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8주기 추모일을 앞두고 있다. 그해 4월 온 나라에 생중계를 하면서 바로 눈앞에서 생때같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봤다. 전원 구조는 오보였고 배가 침몰하는 내내 손도 쓰지 못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과 세월호 참사, 두 사건은 이에 대응하는 국가와 책임자의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죄도 없었고 책임도 회피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묻힐 거라고 기대하는 걸까. 진실규명이 되지 않는 한 국가권력이 자행하는 피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되풀이되고 있다.

진실규명을 위해 애쓰겠다던 책임자마저 침묵하는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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