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집중 공격하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 지역에 마련된 임시 수용시설에 지난 18일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이 모여 있다. 타스 연합뉴스
[코즈모폴리턴] 신기섭 |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전쟁의 첫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틀린 말이다. 전쟁의 첫번째 희생자일 뿐 아니라 가장 아까운 희생은 사람이다.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우크라이나인이건 러시아인이건, 그 가치는 모두 같다. 그리고 어떤 명분으로도 이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두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말 그대로 ‘셀 수 없는’ 목숨이 희생되고 있다. 전쟁이 끝날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진실’은 전쟁의 두번째 희생 대상이다. 침공 초기부터 온라인과 언론을 통한 ‘정보 전쟁’이 그 어느 국제 분쟁 때보다 치열하게 벌어지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 됐다. 세계경제포럼의 ‘전략 인텔리전스’ 플랫폼 디지털 편집자 존 레칭은 이번 전쟁이 ‘첫번째 틱톡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짧은 동영상을 공유하는 이 소셜미디어에서 침공 반대자와 지지자들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어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트위터, 텔레그램 등 다른 소셜미디어 사정도 별로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 참상에 대한 ‘서로 다른 진실들’이 온라인에서 넘쳐나는 데는 러시아 정부 그리고 서방 정부들 탓도 있다. 러시아는 침공 세력이라는 ‘원죄’가 있는데다 우크라이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제적인 신뢰도 잃은 지 오래다. 전쟁 뉴스가 우크라이나와 서방 쪽 주장 일변도가 되도록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 영국, 유럽연합(EU) 등 서방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함께 <아르티>(RT) 방송 등 러시아 언론 차단 조처도 단행했다. 가짜 뉴스를 퍼뜨리며 러시아 정부의 선전선동(프로파간다) 도구 노릇을 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언론의 자유는 열린 사회의 양보할 수 없는 가치라는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신념’도 러시아 제재 앞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소수일지언정 ‘다른 주장’에 호기심을 느끼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이들은 온라인 등에서 러시아 쪽 주장이 힘을 얻는 데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게 된다. 서방이 러시아의 ‘가짜 뉴스’만 탓하기 곤란한 이유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정보 전쟁은 세계 많은 사람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가 당장의 현실인 사람들도 있다. 옛소련에 속하다가 독립해 러시아계 주민들이 전체의 25% 수준인 발트해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미국 <엔비시>(NBC) 방송은 에스토니아의 러시아어 사용자들은 흔히 3개 그룹으로 나뉜다고 전했다. 3분의 1 정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고 소수는 침공을 지지하는 가운데, 다수는 평화를 원하지만 서양 언론과 러시아 언론의 상반된 보도에 혼란을 느낀다고 한다. 게다가 러시아 정체성이 한때는 선거에서 이용될 만큼 일정한 힘으로 작용했지만, 지금은 안보 문제라는 관점에서 보는 대상이 됐다고 방송은 전했다.
라트비아에서도 다수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다. 캐나다 매체 <토론토 스타>는 지난달 러시아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가량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혼란에 빠진 러시아계 사람들에게 ‘진실’은 책상물림 따위의 한가한 놀이 대상이 아니다. 실존적 결단을 내리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이자 힘이다. 그래서 앞에 했던 말을 번복해야 할 것 같다. “전쟁의 첫번째 희생자는 사람과 진실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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