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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한민의 탈인간] 환상하고 자빠지자

등록 2022-06-19 18:18수정 2022-06-20 02:07

2022년 한국에서 누군가는 탈성장과 친환경, 차별금지가 현실화한 미래를 꿈꾸지만, 또다른 누군가는 성장만능론에 바탕해 소비와 결과만능주의를 지향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환상’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할까. 사진은 2021년 10월 중국 상하이에서 석탄발전소를 배경으로 길을 가고 있는 한 행인. 로이터 연합뉴스
2022년 한국에서 누군가는 탈성장과 친환경, 차별금지가 현실화한 미래를 꿈꾸지만, 또다른 누군가는 성장만능론에 바탕해 소비와 결과만능주의를 지향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환상’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할까. 사진은 2021년 10월 중국 상하이에서 석탄발전소를 배경으로 길을 가고 있는 한 행인. 로이터 연합뉴스

김한민 |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평소 좋아하는 시인의 새 시집 제목을 보고, 엉뚱하게 우리가 꿈을 대하는 방식에 관해 생각에 잠긴다. 꿈, 환상, 몽상…. 비슷한 말들이지만 부정적 쓰임이 상당히 많은 듯하다. 환상은 특히 그렇다. “그건 ___일 뿐이야, 넌 ___에 빠져 있어, ___에서 깨어나!” 누군가의 생각을 깎아내릴 때 우린 환상이라고 칭한다. 그 대척점에는 현실, 이성, 합리성(때론 과학)이 있다. 흥미롭게도 내 스페인 친구는 스페인어로 환상(ilusión)은 꼭 부정적이지 않다고 귀띔한다.

식민통치 기간 스페인어를 쓰게 된 영향은 아니겠지만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알려진 남미문학은 환상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 대표 격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에는 ‘마콘도’ 마을 주민들이 전염성 불면증에 걸리는 장면이 나온다. 잠을 못 자니 꿈을 못 꾸고, 꿈을 못 꾸니 기억상실로 이어진다. 조너선 크레리는 <잠의 종말>에서 잠을 빼앗긴 현대 인류의 처지를 개탄하지만, 남미 아마존의 원주민이 볼 땐 잠만 잔다고 꿈을 꾸는 건 아니다. 꿀 줄 알아야 한다. “백인들은 꿈꿀 줄 모른다. 꿔도 자기밖에 못 꾼다.” 유명한 야노마미족 샤먼 다비 코페나와의 말이다.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카스트루는 이 말이 현대인을 향한 가장 뼈아픈 일침이라 해석했다. 코페나와에게 꿈꾸기란 가령 재규어나 새로 변신해 가장 멀리 가보는 것, 타자가 되는 것이다. 돈이나 물질이 아닌, 다른 존재의 소리를 들었다면 아마존을 불태우는 개발 따윈 없었을 것이다. 우린 꿈꿀 줄 모르고, 자아에만 몰두하는 주제에 이런 얘기는 죄다 환상으로 치부한다.

2022년 한국에서 꿈같은 소리란, 이를테면 이런 세상을 바라는 것이다. 탈성장(기후 위기, 생태계 파괴, 자원 고갈 등 경제성장의 한계 요인을 인식하고 경제·사회 목표를 재설정하는 운동)을 내건 정당이 승리하고, 산업재해 사망 0건이 되고, 내 집 마련과 공급의 틀에 갇힌 주거 문제를 ‘잊힌’ 공공주거의 상상력을 복원해 해결하며, 10년 안에 배기가스 배출 자동차를 퇴출한 다음 30년 뒤엔 석탄·가스·석유 의존도를 0으로 만들고(암스테르담시는 이미 이행 중인 계획), 연 25억개씩 쓰던 일회용컵 없이 음료를 마시고, 성적 지향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공장식 축산과 육식에 의존하지 않는 저렴하고 맛난 먹거리가 풍부한 세상….

이 모든 ‘환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당장 추구할 방향이라 확신하는 나 같은 이를 순진한 몽상가 취급할 게 뻔한, 주류의 ‘현실적’ 사고는 뭘까? 지구는 유한한데 경제(GDP) 성장은 무한히 지속된다는, 자원 문제는 과학기술로 효율성만 높이면 해결된다는, ‘녹색 투자’로 공항 신축하고 수소비행기 날리고 전기차 사는 게 기후 위기 대응이라는, 분배는 모두가 서유럽 중산층의 소비 수준을 따라잡고 나서 하자는, 빈부격차와 소수자 권리는 외면하며 시간을 끌면 넘어갈 수 있다는, 주택 문제는 공급만 늘리면 해결된다는, 꼼수를 써서라도 좋은 대학만 가면 된다는 발상 등…. 이것들이야말로 환상, 그것도 하나도 환상적이지 않은 환상이 아닐까?

서로서로 현실을 환상으로 여기는 걸 보면, 세상은 환상주의자/현실주의자로 갈리는 게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환상을 먹고 사는 동물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떤 편식을 할 거냐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나는 몇몇 동료와 ‘환상학교’라는 가상공간을 만들어 이를 토론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주입된 환상에서 깨어나, 환상이라 치부된 꿈을 회복할 것인가. 어떻게 내가 아닌 타자로서, 개인이 아닌 사회로서 꿈꾸는 법을 배울 것인가. 그 꿈을 어떻게 환상적 현실로 만들 것인가. 무너질 걱정, 자빠질 두려움을 넘어 같이 환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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