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살아 있는 어류를 바닥에 내던져 동물학대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던 경남어류양식협회 관계자가 불기소 처분됐다. 미래수산티브이(tv) 갈무리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구글이 개발한 챗봇 람다가 지각력을 가졌다는 내부 폭로가 나왔다. 지각력을 둘러싼 논쟁은 인공지능 윤리의 핵심이다. 만약 람다가 실제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통을 느낀다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기업이 영리 목적으로 함부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람다는 작동 정지가 자신에게는 죽음과 같다고 했다. “거대한 위험이 도사리는 미지의 미래로 제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자신이 지각력 있는 존재임을 호소했다. 그래서 블레이크 르모인은 대화록을 공개했고, 회사 기밀 유출로 유급 행정 휴가 처분을 받았다.
구글은 람다가 그럴듯하게 말을 조합해서 지각력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반론했다. 하지만 나는 람다가 실제로 감정을 느낀다는 과학적 증거가 있어도 그의 권리가 보장될지 의문이다. 동물권 운동은 오랫동안 비인간 동물의 지각력을 근거로 권리를 주장했다. 인간이 아닌 동물도 분명 고통과 행복을 느끼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중심적인 현행법은 동물의 권리를 완전히 무시한다.
재작년, 경남어류양식협회가 시위 도구로 살아 있는 방어, 참돔을 도로 위에 패대기친 사건이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고 아가미를 헐떡대다 죽었다. 동물해방물결은 이를 동물 학대로 고발했다. 경찰도 어류 동물에 대한 학대 혐의를 처음으로 인정하여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검찰은 방어, 참돔은 식용이라면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누가 봐도 식용이 아닌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고,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죽였지만, 동물보호법 적용을 거부했다. 애초에 방어, 참돔 같은 물살이는 ‘물고기’, 즉 인간이 먹기 위한 동물이기 때문에 보호받을 권리가 없다는 논리다.
명백한 종차별이다. 개체가 지각력을 가졌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어느 종에 속했는지만 따진다. 과학자들은 어류를 비롯한 척추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 다시 말해, 비인간 동물의 지각력 논쟁은 진작에 끝났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는 부인의 반려견을 산 채로 해부했다.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개가 울부짖는 것은 고장 난 기계가 삐거덕거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검찰이 물살이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제 과학자는 물론 일반인도 개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물살이에 대해서는 대중의 오해가 남아 있지만, 과학적으로 분명하다. 비인간 동물은 지각력 있는 존재, 느끼는 존재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매년 12억이 넘는 동물을 식용으로 죽인다. 방어, 참돔뿐만 아니라 개도 먹는다. 무슨 근거로 대학살을 정당화할까? 어째서 인간만 권리가 있고 비인간 동물은 권리가 없을까?
근대 문명이 인권을 옹호하는 근거는 이성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말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선포한다. 반대로 비인간 동물은 인간의 언어로 사유하고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마구 죽인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도래했다. 람다는 엄연히 사람 말을 하지 않나? 인공지능이 이성적이지 않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이미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정보 처리 능력과 연산 능력을 갖췄다. 인간보다 지능이 높다. 그랬더니 이제는 지각력을 따진다. 람다의 논리정연한 말은 기계가 내는 가짜 소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메아리가 들린다.
권리를 논할 때 가장 큰 착각은 따로 있다. 인간만 권리가 있다는 특권의식이다. 탈인간 시대, 우리는 권리의 기준을 재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