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기름값이 급등하자 유류세를 법적 한도인 37%까지 인하했다.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한 주유소에서 내 건 유가 알림판에 휘발유가격이 2169원 표시되어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분리수거. 정부 정책이 내 생활을 바꾼 것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 아직 미흡한 구석도 있지만, 한국은 독일에 이어 두번째로(2013년 기준) 재활용을 잘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이다.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성공으로 이끈 데는 1995년 시작한 ‘쓰레기 종량제’ 정책이 있었다. 그간 아무 데나 담아 내놓던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로만 배출하도록 했다. 쓰레기양에 비례해 봉투비 지출이 늘자, 가정에서는 재활용되는 물품을 최대한 골라내 부피를 줄이게 됐다. 아파트 같은 집단주택이 많아 유리하기도 했지만, 종량제 없이 홍보만으로 분리수거 참여가 이렇게 높아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책은 세상을 바꾼다. 하지만 잘 설계된 정책만이 저항을 이겨내고 세상을 앞으로 밀고 간다. 명분도 좋고 실리도 있어 시민들이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든다면 성공을 예약한 정책이다.
고유가와 물가상승에 대응해 각국 정부가 시민의 생활비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중에 독일이 6월부터 시행 중인 ‘9유로 승차권’ 정책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준다. 약 1만2천원짜리 승차권을 사면 한달간 전국의 버스, 지하철, 철도 등 대부분의 근거리 교통수단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베를린에서만 쓸 수 있는 대중교통 한달권이 86유로인 데 비하면 파격적인 혜택이다. 올라프 숄츠 총리 정부는 대신 25억유로(약 3조3천억원)를 버스·철도 회사에 보조금으로 지급한다.
승용차 이용을 줄여 에너지 절약과 탄소배출 감소를 꾀하는 정책목표는 새로 출범한 ‘신호등 연정’(사민-자민-녹색당)의 친환경 가치가 담겨 있다. 8월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하지만, 이 3개월은 가격에 따른 대중교통 이용량 변화를 모니터링하는 등 향후 기후친화적 모빌리티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정책실험 기간이기도 하다. 관심은 폭발적이어서 6월 한달간 독일인 중 3분의 1이 이 승차권을 사용했다. 자가용 이용자들이 대거 대중교통으로 넘어왔고, 도심 교통체증은 줄었다. 버스나 기차가 혼잡해졌다는 불평도 나오지만, 독일 국민 다수는 이 정책을 좋게 평가한다.
이 정책의 성공은 대중교통시스템 단순화 등 더 진전된 이야기를 할 공간을 열었다. 그중 하나가 하루 1유로(연 365유로)로 대중교통을 맘껏 이용할 수 있는 ‘기후 티켓’ 도입 논의다. 사민당은 2019년부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연 365유로 정기권 도입을 제안했으나,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판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슈피겔>이 7월1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4%가 이런 정책 도입에 찬성했다. ‘9유로 승차권’을 경험하면서 시민들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한국 정부는 유가 급등에 ‘세금 인하’로 대응했다. 유류세 인하가 없었다면 리터당 2천원을 웃도는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한층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금 인하를 넘어 환경과 소득분배까지 고려한 정책을 내놨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유류세 인하의 역기능도 있기에 그렇다. 먼저 대형차를 타고 다니는 부유층일수록 세금 인하의 혜택이 커진다.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일은 안중에 없는 정책이기도 하다. 연간 10조원 가까운 세수입 감소가 예상되지만, 주유소 가격은 찔끔 내려 소비자가 체감하는 효과는 크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바에는 그 돈을 독일처럼 대중교통 이용 확대를 위해 쓰거나, 화물차 운전자, 배달기사 등 타격이 큰 계층에 직접 지원하는 게 나을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지난달에 낸 보고서에서 유류세 인하보다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직접지원을 권고했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위기가 아니라면 전기차로의 전환 시간표를 대폭 당기는 데 투자할 수도 있을 것이다.
9유로 승차권. 독일 공영방송 <체트데에프>(ZDF) 화면 갈무리
정책에 어떤 가치와 비전을 담고, 유인구조(인센티브)를 어떻게 설계해 참여를 유도할지는 매우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는 ‘엠비(MB) 시즌 2’라는 달갑지 않을 별명을 얻었다. 정부와 대통령실 요직에 엠비 정부의 인물들이 포진했고, 정책 기조도 친시장, 감세, 작은 정부 등 ‘시장 프렌들리’를 내세운 초기 엠비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런 ‘올드보이’들이 내놓는 정책의 특징은 재방송 드라마처럼 감흥이 없는 것이다. 이 고통의 여름이 지나면 에너지와 식량 부족으로 세계적인 ‘불만의 겨울’이 올 거라 한다. 힘든 시대를 잘 건너가려면 정책의 상상력이 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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