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경기도 수원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2022 프로야구 KBO리그 LG 트윈스와 kt wiz의 경기. 9회말 교체 투입된 LG 고우석이 역투하고 있다. 연합뉴스
[뉴노멀-혁신] 김진화 | 연쇄창업가
서울 문래동 좁은 골목에 ‘무정형’이라는 칵테일바가 있다. 허름한 단층 상점에 간판도 없이 쇼윈도를 그대로 오픈한 모양새는 뭐 하는 집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무질서하고 키치스러운 오브제와 조명들을 지나쳐 술병이 빼곡히 들어선 찬장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다. 무정형도 또 다른 정형일 수 있지만 묘한 긴장감을 유발하기엔 충분한 배치인데, 어수선함이 가시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목구멍이 포도청’ 같은 익살스러운 이름이나 쑥을 향신료로 쓴 창작 칵테일이 생경하거나 어설프게 느껴지지 않는 것 역시 탄탄한 기본기 때문일 테다.
‘엘리베이터 피치’는 간결한 프레젠테이션을 일컫는다. 시간을 따로 내줄 수 없는 바쁜 투자자 혹은 의사결정권자에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사업의 핵심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어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스타트업 대상 각종 행사에서 경진대회 방식으로까지 쓰이며 유행했지만 이제는 자취를 감췄다. 1분 내외 시간에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명료한 아이디어가 주는 매력이 크지 않으며, 명료하게 들리는 아이디어일수록 복잡다단한 현실지형을 매끈하게 단순화하는 오류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기 때문이다. 방 하나 없이도 전세계 어느 호텔 체인보다도 더 크게 성장한 에어비앤비가 처음 아이디어를 공개하며 투자를 유치했을 때 “멍청한 아이디어” 취급을 받았던 것은 유명한 사례다. 투자자 벤 호로위츠는 “혁신이 힘든 것은 진정 혁신적인 아이디어일수록 당시엔 나쁜 아이디어처럼 들리기 십상이라서”라고 난망함을 토로한 바 있다. 엘리베이터 피치가 철 지난 미인대회 취급을 받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명료화하기 힘들고 외려 멍청하게 들리는 아이디어 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게 경쟁력이 되고 있다니 말이다.
시즌 막판 프로야구 판도에 미묘한 균열이 감지된다. 줄곧 선두를 지켜온 에스에스지(SSG) 랜더스가 주춤한 사이 엘지(LG) 트윈스가 치고 올라오는 형국이다. 잘되는 집안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리그 최고의 철벽 마무리로 거듭난 투수 고우석을 빼놓고 이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정의하기 어려운 공을 던지고 싶었다.” 선문답 같은 며칠 전 인터뷰는 이 스물네살 영건이 어디까지, 얼마나 더 성장할지 가늠조차 어렵게 한다. 그가 뿌려대는 시속 150㎞ 후반대 속구보다 상대 팀 타자들을 더 헤매게 하는 것은 140대 후반과 150대 초반을 넘나드는 그 “정의하기 힘든” 구종이다. 해설위원들도 고속 슬라이더 내지는 컷 패스트볼 등 부르는 게 제각각이다. 타자의 타이밍을 뺏고 눈을 현혹해야 하는 투수들은 흔히들 투구 동작을 최대한 감추는 디셉션이나 변칙적인 투구폼 등을 무기로 삼기 마련이다. 쉽사리 정의하기 힘든 구종이 갖는 파괴력은 단순히 혼란을 유발하는 것을 넘어 다른 전형적인 구종까지도 더 위협적으로 느껴지게 해 효과를 배가시킨다는 점에서 변칙 그 이상이다.
흥미롭다는 뜻의 영어 단어 ‘interest’는 라틴어 ‘사이’(inter)와 ‘존재’(esse)에서 유래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로알드 호프만은 이를 두고 “(무엇의 중간에서) 어떤 대상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대상에게 일종의 생명감을 부여”한다고 강조한다. 제대로 모호한 것은 실로 매력적이다. 할 수만 있다면.
외교에서 말하는 ‘전략적 모호함' 역시 아무나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아니다. 긴장감을 견뎌낼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대부분 나약한 자는 불순한 자들이 내건 깃발 아래로 투항하고, 비겁한 자들은 회색지대에 남는다. 모호함의 가능성을 탐색할 기회는 진정 용기 있는 자들의 몫이다. 당신이 서 있는 마운드가 어디든 간에, 상대를 향해 ‘정의하기 어려운’ 공을 던지기 위해 분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