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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영국 ‘변호사 파업’의 속사정

등록 2022-09-22 19:07수정 2022-09-23 02:37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코즈모폴리턴] 신기섭 |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물가 폭등으로 고통받는 영국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파업이 잇따르는 가운데 형사법정에서 변호 업무를 맡는 변호사들도 지난 5일부터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파업은 형사재판 중단 사태를 부르면서 한때 영국의 자랑이었던 법률구조 제도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영국은 시민들이 경찰 조사 단계부터 재판 때까지 돈이 없어서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보장하는 법률구조 제도를 잘 갖춘 나라다. 경찰에 체포되거나 조사를 받을 때는 누구나 무료로 ‘사무변호사’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형사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들도 변호사를 고용할 여유가 없을 경우 지원받을 수 있으며, 이 경우 법정에서 변론할 자격이 있는 ‘법정변호사’(배리스터)가 나선다. 일종의 ‘국선변호사’인 셈인데, 기소한 정부 쪽도 대리한다는 점에서 다른 여러 나라의 국선변호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파업을 벌이는 이들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법정변호사 2천여명이다. 이들은 법률구조 보수 25%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변호사들은 파업 16일째인 지난 20일 신임 브랜던 루이스 법무부 장관과 처음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 정부는 보수 15% 인상을 제안했지만, 변호사들은 어림없다고 맞서고 있다.

형사재판 중단까지 초래한 변호사 파업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영업자이며 수입 대부분을 법률구조 활동에서 얻는 법정변호사들의 사정은 아주 심각하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들의 보수가 업무 건당 77파운드(약 12만2천원)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며, 이는 영국의 최저임금(시간당 9.5파운드, 약 1만5천원)에도 못 미친다고 전했다.

크리스토퍼 벨러미 법무부 의회담당 차관이 지난해 11월 내놓은 ‘형사 법률구조 검토보고서’를 보면, 3년차 미만 변호사 중 하위 25%의 2019~2020년 연평균 수입은 1만1600파운드(약 1840만원)에 불과했다. 이는 각종 경비를 빼기 전 수입이어서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훨씬 적다. 조사 대상 전체 변호사 2690명의 평균 수입도 7만9800파운드(약 1억2640만원)로, 주요 법률사무소 소속 민사변호사 초임(10만파운드)에도 크게 못 미친다. 보고서는 보수를 적어도 15% 이상 즉각 인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형사변호사들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진 것은 관련 정부 예산이 계속 줄었기 때문이다. 정부 예산은 2004~2005년 12억파운드에서 2019~2020년 8억4100만파운드 수준까지 낮아졌다. 벨러미 차관은 물가 인상 등을 고려한 실질 예산은 15년 사이 43% 준 셈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카디프대 법대 대니얼 뉴먼 교수와 글래스고대 법대 재클린 킹헌 교수는 최근 전문 뉴스·논평사이트 <더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변호사들은 절망적인 상황”이라며 “최근 변호사 대상 대규모 조사에서 94%가 보수에 견줘 일이 너무 많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는 파업 전까지 변호사 부족 등으로 지연되고 있던 형사재판이 약 6만건에 이를 정도로 영국 사법제도의 위기가 심각했다고 전했다. 영국인들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국가보건시스템(NHS)도 코로나19 대유행 여파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영국 변호사 파업 사태는 훌륭하게 설계된 시스템을 잘 유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경우, 그 시스템이 순식간에 사회 전체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돌변한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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