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에델 언더우드(1888~1949)
어려서 고생이 많았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새아버지는 재혼했다. 갈 곳이 없던 에델 밴 왜거너는 이복오빠 집에서 더부살이했다. 하루 다섯시간만 자며 일하고 공부했다.
24살이던 1912년 식민지 조선에서 외국인학교를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태평양을 건너왔다. 학년이 다른 학생 수십명을 혼자 가르치며, 대를 이어 조선에서 크리스트교 선교사를 하던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남편 집안이 유명한 언더우드 가문이다. 시아버지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한국 이름 원덕우. 남편은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 한국 이름 원한경. 결혼해 에델 언더우드가 된 뒤에도 한국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사회사업에도 열심이었고, 특히 여성 인권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한지은의 논문 ‘언더우드가의 여성 선교사들’) 크리스트교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금주 운동도 벌였다. 술을 핑계 삼아 아내를 욕하고 때리는 한국 남자가 많던 시절이었다. 해방 뒤에는 가난한 여성들이 성매매 업소에 팔려 가는 일을 막으려 애썼다.
1949년 3월17일 암살당했다. 그날 오후 집(현 연세대 언더우드기념관)에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모윤숙과 교수부인회 20여명이 함께 모임을 하던 중이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청년은 방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겼고 옥신각신했다. 소란한 틈을 타서 또 한명이 뒷문으로 들어와 뒤에서 총을 쏘았다.” 아들 원일한의 회고다.
닷새 만에 검거된 범인들은 경찰 조사에서도 법정에서도 “모윤숙을 암살하려다 실수로 그를 쏘았다”고 진술했다. 미주 신문 <국민보>는 이승만 정부가 암살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둘 다 허점이 많다.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정치적 노림수로 암살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한국과 미국 양쪽에 알려진 미국인을 살해해 한-미 관계를 악화시키려 했다는 것이다.(홍이표의 논문 ‘언더우드 부인 저격 사건의 진상과 의미’)
1949년은 “암살의 해”라 불린다(오소백 기자의 표현). 에델 언더우드가 숨지고 석달 뒤인 6월에는 백범 김구가 암살됐다. 이듬해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