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려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말고] 정나리 | 대구대 조교수
지난달 한일정상회담 소식에 친구가 농담을 건넸다. “어떤 구식민지도 영국의 온전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어. 그래서 우리 인도는 아예 인도인을 영국 총리로 만들었잖아, 너네도 그렇게 할 수 있겠니?” 한바탕 웃었으나, 마무리는 씁쓸했다. “하지만 그는 뼛속까지 토리(보수주의자)이고 엘리트야.” 국민, 서민, 보통 사람을 호명하는 게 권력의 일상적 수사이자 당연한 전략이라지만, 한국어로 사유하고 소통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단일한’ 국민이 있었던 적이 있나. 금융 엘리트는 ‘케케묵은’ 국가의 경계 따위를 넘어선 지 오래되었고, 평균재산 46억을 훌쩍 웃도는 정치 엘리트와는 말 그대로 피로 맺어진 친인척이다. 수많은 내부적 차이에도 완결된 ‘우리’를 ‘상상’ 가능하게 한 공통된 경험의 축적에는 일본, 미국, 북한과 같은 다양한 ‘타자’와의 관계가 있었다. 그들과의 특정한 환대와 유대 또는 적대와 폭력의 기억이 때에 따라 강조되거나 지워지는 지난한 현재적 작업이 지속된다.
오늘의 기억 작업은 교과서 낡은 흑백사진 속 이위종에 잠시 머문다. 근대 한국인 엘리트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그에게 생은 마냥 탄탄대로도 아니었고, 부귀영화로 귀결되지도 않았다. 그는 부친의 근무지인 미국과 프랑스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러시아에서 외교업무를 도왔다.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이어서인지, 그도 사관학교를 다녔다. 당시 서양 유학에 따르는 책무감은 가볍지 않았을 것이고, 근대의 중심과 주변 사이에 낀, 또는 두 시공간을 동시에 체현하는 존재로 흔들림도 있었을 테다. ‘제국’이 ‘식민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에게 주어진 공적 임무는 이상설, 이준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25살에 급제하여 성균관 관장,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 등 여러 관직을 맡았던 이상설은 충청북도 진천의 신동이었다. 10여 년 동안의 수학기 시절 신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익혔다는데,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전통과 근대의 학문 세계를 넘나든 전환기의 고위공무원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울분을 참지 못한 그가 “땅에 몸을 던지고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거꾸러지니, 머리가 깨져 피가 솟았다”는 일화(황현의 <매천야록>)는 유명하다. 이준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검사로 최초의 법관양성소 1기 졸업생이었다. 국제법에 능통한 그를 비롯한 구한말 엄친아 3인은 1907년 여름, 회의가 한창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헤이그에서의 일은 익숙한 이야기. 이후, 한일병탄 소식에 이위종의 부친인 근왕파 이범진은 세상을 버렸지만, 이위종은 제정러시아의 장교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소비에트 혁명군 장교로 내전에서 싸웠다. 볼셰비키당원이 되고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에서 한인 부대를 이끌었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 ‘망국의 엘리트’가 짊어졌던 과제는 결국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연대와 해방’이라는 코스모폴리탄적 ‘꿈’에 합류하였다.
무심코 조선어 감탄사를 내뱉었다가 교사에게 손바닥을 맞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문득 떠올리고, 할머니와 또래였을 소녀들 생각에 분노하는 건 때아닌 ‘열등감’ 때문도, ‘민족국가’의 틀에 매달려서도 아니다.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적대와 폭력의 확장성을 차단하고 환대와 유대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멈출 수 없는 기억 작업일 뿐이다.
동네를 걷다 보면 한 블록에 교회, 절, 신당, 철학관이 둘씩도 모여 있다. 환대에의 간절한 희망과 욕망, 적대에의 두려움과 불안이 공존한다. 하늘 높은 새 아파트에 불빛이 하나도 없는가 하면, 폐허가 된 70년대식 주택에서 덜컹, 녹슨 문을 열고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3년 만의 축제에서 학생들이 떼창하던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너와 나, 영영 닿을 수 없는 사이 되어도, 잊어버리지마, 잃어버리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