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야!한국사회
너무 흔하게 사용되는 말인지라, 일체의 반성적 의식을 무력하게 하는 표현들이 있다. 가령 ‘천민적 자본주의’라는 표현이 그렇다. 속물 근성과 파행적인 투기심리를 포함한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고자 할 때, 언론에 흔히 등장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표현이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천민’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천민이란 무엇인가. 봉건적 신분질서 속에서 가장 억압당하고 배제된 계층을 일컫는 말이다. 프랑스 인권선언 이후 현대적 인권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천민이라는 계층적 조건에 대해 오히려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것이 의미 있는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용어를 자본주의를 규탄하는 관형어로 쓰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말을 통해 공격할 때 ‘병리학적 은유’가 흔히 등장한다. 가령 최근 한 정치인이 전임 대통령에 대해 ‘치매 환자’ 운운한 것이 그런 경우다. 대다수 언론은 원로정치인을 그렇게 매도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물론 그런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내 판단에는 더 ‘깊은 비판’이 필요했다고 본다. 왜 그럴까. 이는 치매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을 언어적으로 모욕한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철밥통’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에 빠져들기 전에, 우리 사회는 ‘철밥통’으로 가득했다. 나는 사람에게 무척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신분의 안정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과 계약직 문제를 둘러싼 노동자와 경영주, 그리고 정치권의 날카로운 갈등은, 역으로 신분안정에 대한 대중적인 욕망의 치열함을 환기시킨다. 나는 모든 사람이 깨지기 쉬운 ‘유리밥통’의 소유자이기보다는 철밥통의 소유자가 되는 사회가 복지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철밥통을 나무란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사회 지도층’이란 말 역시 동의할 수 없는 표현이다. 도대체 누가 누굴 지도한단 말인가. 차라리 이 말보다는 ‘여론 주도층’이라는 표현이나 ‘기득 이권층’이라는 표현을 사안에 따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이 표현대로라면, 어떤 계층의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를 지도해야 하고,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그 지도를 순순히 학습하고 이행해야 된다는 말인데, 과연 이게 말이 되는 표현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정신병자’라는 표현도 나는 마뜩잖다. 도대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얼빠진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공격할 때 이런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에는 ‘신경증 환자’도 있고 ‘분열증 환자’도 있다. 그것은 마음의 병이어서 상담치료를 통해 고쳐야 하지만, 고통에 빠진 환자를 오히려 저주하는 이런 표현이 남발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의 건강성도 의심해 봐야 한다. 한 사회가 소유하고 있는 ‘국어사전’의 총량은 흔히 문화와 문명의 잣대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상용어 사전’은 그 사회의 풍속과 일상을 잘 보여준다.
문학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 시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강의 첫 시간에 문학은 ‘상투어’를 극복하는 노력이라 말했다. 지금의 나는 상투어도 문제지만, 그것을 상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사실은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상투어에 대한 창조적 사고가 필요하다.
이명원/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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