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영국에서 구국외교 펼치다 순절한 대한제국의 외교관

등록 2023-05-11 19:16수정 2023-05-12 02:38

[나는 역사다] 이한응 (1874~1905)

1874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문을 배웠다. 1889년 서울에 와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웠다. 1894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그해 동학농민전쟁에 관군 지휘관으로 출전했던 아버지가 전사했다. 삼년상을 치르고 1897년 한성부(서울시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99년부터 관립 영어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01년 외교관이 돼 주영공사 민영돈과 런던에 부임한다. 공사를 보좌하다 1904년 민영돈이 귀국하자, 공사서리(대리공사)로 남아 혼자 업무를 맡았다.

대한제국 정부가 국제정세를 통 몰랐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는 조금 달랐다.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 목표는 중립국화였다. 자기 나라 군대로 중립을 지키는 스위스 모델 대신, 열강의 세력 균형으로 독립을 보장받은 벨기에 모델을 지향했다. 그러기 위해 강대국이었던 영국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한응이 맡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 정부는 싸늘했고 이한응은 좌절했다. 연구자 송재용은, 이한응이 1904년부터 괴한에게 쫓기며 살해 위협을 당했다고 한다. 그해 2월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관계 처리를 사실상 통제하기 시작했다.

1904년 1월21일, 대한제국은 중립국이 됐다. 밀사가 일본 몰래 중국 땅 지부에 건너가 중립국 선언을 여러 나라에 타전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같은 강대국 정부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최덕규의 2019년 논문에 따르면, “주권국가인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국제법적으로 전시 중립국가가 되었으나, 일본은 한국의 중립을 존중하지 않았고 미국 역시 일본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일본은 중립국 선언을 무시하고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이한응은 한국의 중립국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영국 외무성 관리들도, 한국의 다른 외교관들도 모른 척했다.

1905년 5월12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신의 주검 운구에는 저축해둔 자기 월급을 쓰라고 당부하는 유언장을 남겼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반년 전 일이다. 일제 침략과 강대국들의 외면 속에 망국의 길에 들어선 구한말 최초의 순국열사다. 테라코타로 빚어보았다.

김태권 만화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