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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터에서

등록 2023-06-25 18:45수정 2023-06-26 02:37

지난 1월 어느 직거래장터 풍경. 연합뉴스
지난 1월 어느 직거래장터 풍경. 연합뉴스

[서울 말고] 정나리 | 대구대 조교수

동네 상가는 군데군데 비어 있고 ‘학원 우대’, ‘병원 우대’라고 쓰인 임대 광고 펼침막만 펄럭인다. 지난달만 해도 분주해 보이던 옛날 통닭집과 만둣집이 이번 달에 가보니 없어졌다. 그나마 온기가 남아있는 곳은 노부부의 칼국수집. 맑은 깍두기에 아삭고추 두개를 찬으로 내어주는 5천원짜리 칼국수를 먹으며 동네가 조금은 집처럼 느껴진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불현듯 살아나 북적이는 동네다.

누구한테 배운 건지, 장터에선 꼭 안 살 것처럼, 너무 비싼 것처럼, 오백원, 천원을 두고 ‘밀당’을 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새벽같이 들고나왔을 우악스러운 시금치 한포대가 어느새 깨끗하게 다듬어져 한묶음씩 곱게 쌓인 모양에, 흥정을 포기하고 군말 없이 제값을 치른다.

남태평양 파푸아뉴기니의 시장에 관한 인류학자 마크 버시 팀 연구에 의하면, 신선한 농산물이 판매되는 그곳의 야외장터는 국가경제와 식량안보, 그리고 사람들 생계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20세기 중반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정부가 백인 주재원들의 식료품 확보를 위해 장려하며 시작된 야외장터는 그동안 인구증가와 그에 상응하지 못한 고용률, 외부요인에 취약한 수출용 환금작물의 불안정성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현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성장했다.

장터에는 직접 생산한 물품을 파는 이도, 남이 만든 것을 사서 내다 파는 전매자도 있는데, 그곳에선 전자가 도덕적 우위를 차지한다. 교환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관계 속의 인간’이며, 그래서 관계와 노동이 집약된 결과물로서 ‘고구마’는 곧 구매자의 몸으로 통합돼 사회생태적 의미망을 이어갈 선물 같은 상품이다.

즉, 장터에서 거래되는 건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여느 물건이 아니다. 상품의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가 더 상위에서 작동하는 시장에서, 전매란 생산자와 물건의 신성한 관계를 가리는 ‘나쁜’ 행위일뿐더러, ‘노동’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신선식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들어간 사람들의 노동에 기초하지 수요공급의 원리나 가격경쟁력과는 상관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시끌벅적한 시장과 달리 연구팀이 관찰한 장터에선 신기하게도 경쟁이나 흥정도 드문 편이어서, 교환이 조용하게 끝난다고 한다.

고도화되지 않은 주변부 소규모 비공식 경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연구팀은 팬데믹으로 흔들렸던 파푸아뉴기니의 식량 공급 시스템을 보완한 것이 바로 야외장터였다며,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의 자생적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고 본다. 당연하게도, 실체가 모호한 유령 같은 상품들이 ‘교환가치가 오르리란 기대’에 의해 거래되는 금융시장, 부동산시장만으로 사람들은 살아갈 수 없다. 삶과 노동을 지운 채 철저히 소외된 상품을 차갑게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일한 시장체제만으로는 위험할 수 있다.

지난해 어느 날부터 옆 동네의 풍경이 바뀌었다. 등산로로 향하는 인도 한쪽에 제철 채소가 나와 있는 것이다. 판매자를 실제로 본 건 한두번 정도일 뿐, 대개는 근처 텃밭에서 직접 키운 농작물이 담긴 상자만 다섯개가 쪼르륵 놓여 있다. 한 봉지당 2~3천원. 덕분에 달큰한 배추와 무가 겨우내 식탁에 오를 수 있었고, 봄에는 향긋한 냉이와 달래를 원 없이 먹었다.

물건은 있는데 판매자가 없을 때가 많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의아해하지만, 곧장 시스템을 파악한다. 필요한 걸 골라 집어 든 뒤 현금 상자에다 돈을 넣는다. 거스름돈을 챙기고 허술한 뚜껑을 잘 덮어두고 가거나, 계좌번호를 찍어가기도 한다. 언제인지 누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냥 물건만 가져가는 사람은 없느냐, 현금은 저렇게 둬도 안전하냐 물었다. 생산자 겸 판매자는 세상 아쉬울 게 없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져가면 가져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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