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문화평론가
세상읽기
자, 이 사람을 보라. 1974년 반공법 위반,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 1980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1991년 보안법, 학원운용법 위반, 총 복역기간 10년여. 이 인물에 대해 반공, 승공, 멸공의 보루 ‘대령연합회’의 사무총장이자 대변인께서 얼마 전 이런 성명을 날린 바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은 북한 괴뢰와 관련된 무장간첩조직이라는 사실 … 남민전 출신으로 반국가 행위자의 커리어를 지닌 … 그의 객관적인 사상검증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본인의 고백과 전향 의향이 밝혀져야 … 아직도 공산주의 사상을 가슴에 품고 고뇌하는 상태인가?”
이 기구하고 험난한 이력의 소유자는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다. 이태 전 ‘자유수호청년연합’이라는 단체의 사무총장께서 광화문에서 한 연설내용도 떠오른다. “북한 공작금으로 민중당을 창설한 이재오, 고진화, 김문수 등은 북한 조선노동당의 산파역할을 한 고정간첩으로 ….”
죄송하게도 나는 이 단체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명과 연설에서 거명된 ‘의심스러운’ 인물들은 이미 그동안의 행적과 선거과정을 통해 충분히 국가관이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일본군 장교 복무로 친일 의혹을, 여순반란 연루로 남로당 활동 혐의를 받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사상과 국가관에 대해서도 전혀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 모든 혐의는 아버지의 몫이지 본인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재오 원내대표의 한나라당에서 한명숙 총리 후보자에 대한 사상검증을 다짐하고 나섰다. 사무총장 명의로 “청문회에서 한 후보자는 물론 남편 박성준 교수의 사상적 궤적이 가장 중요한 검증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고, 몇몇 신문은 사설을 통해 ‘철저한 사상검증’을 지원사격하고 나섰다. 누구 말대로 이런 게 엽기일까, 아니면 개그일까. 어이없어하기에도 어이없는 이 소모성 만성질환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디제이 정권 말기 총리 인선이 난항을 겪다 예상외의 경영인이 후보자로 청문회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의원님’께서 험악한 표정으로 ‘검증’하는 소리를 생방송으로 똑똑히 보았다. “당신 말야, 강남 룸살롱가에서 소문난 플레이보이라는 말들이 자자해!” 다음날 이 고약한 망발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으리라는 내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의원님 ‘질의’의 수준을 다룬 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한민국 인사청문회의 현주소다.
며칠 전 꽤 재미있는 신문칼럼을 읽었다. 예측불허의 인사 발탁을 예로 들며 대통령의 수읽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통령제가 아찔하다는 저명 사회학자의 글이다. 그 글은 읽기에 따라서 국민에게 베팅을 요구하는,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대통령제를 아예 폐지하는 게 좋겠다는 취지로 판독될 수 있다. 그 대범한 가르침을 본받아 나도 이렇게 말해본다. 차라리 인사청문회를 폐지하는 게 어떨까. 외국에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들여와 본들 제대로 활용할 수준이 되지 못하면 무엇하랴. 논거도 증거도 필요 없다. 일단 만신창이를 만들어놓고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만드는 절차가 한국형 인사청문회가 아닌가. 처가, 시가에다 사돈의 팔촌까지 연루시키는 연좌제가 그것이며, 목적을 벗어난 여야간 기싸움의 장으로 변질되는 게 바로 우리네 청문회 자리다. 게다가 번번이 요구조건을 내세워 참가 자체를 저울질하고 있지 않은가.
사상범 10년이 사상범 2년에게 사상검증의 칼을 들이댄다. 그런데 어쩌랴. 나는 그 사상범죄 12년을 민주화운동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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