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평화포럼 사무총장
세상읽기
얼마 전 일본 도쿄 출장 중 신주쿠 시내의 유명 서점에서 가판대에 수북이 쌓아놓고 팔던 책의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한 권 사 들고 귀국했다. <국가의 품격>이라는 책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장인어른이 늘 ‘격조 있는 삶’을 신조로 하시던 터인데다 필자 또한 ‘격’의 변화로 사회를 설명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터라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끌 만했다. 그러나 책을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책에서 기대했던 고상한 품격의 향기 대신 책이 지향하는 바는 세련된 어휘와 대중적인 호소력으로 구성된 ‘일본’이라는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였고, 그 흐름에는 우경화를 부채질할 수 있는 민족주의 요소가 강하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우려가 된 것은 그의 프로젝트가 ‘일본 만들기’라서가 아니라 품격이라는 용어가 21세기 국가 원리로 채용되면서 우리 안에도 이러한 사고가 만연할 수 있겠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저자인 후지와라는 21세기는 ‘근대성’과 ‘논리’만으로는 국가를 유지하기 어려운 한계에 봉착했다고 진단하고 그 대안으로 품격을 덕목으로 하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정서적인 나라이며 ‘무사도’라고 하는 가치관이 있었던 만큼 그 전통을 복원하여 품격이 있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실천을 위해서 네 가지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가 국가가 완전히 자유로운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추어야 하며, 다음으로 아름다운 전원을 꾸려가야 하고, 끝으로 천재를 배출할 수 있는 교육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 150여년 전 ‘탈아입구’ 논리에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던 일본이 이제는 국가 그 자체를 ‘명품 국가’로 만들어 서구를 앞지르겠다는 것이다. 명품국가로의 탈각은 글로벌화하는 추세 속에서 어쩌면 어느 국가나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론을 서평처럼 시작한 이유는 이 책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비단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의 배경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숨어있는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도 엿보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황우석 사건이 보여준 비극은 민족주의적 시각과 국가의 이익을 지나치게 우선시하는 바람에 우리 스스로 정직해지지 못해서 발생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포츠에서 보여주는 민족주의적 발언과 격한 감정들 또한 때로는 지나치게 부각되어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삼성·엘지·현대 등의 대기업이 이제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미 부상하고 있으며, 그들의 수출품목이 명품에 가까이 가는 만큼 국가의 이미지도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기업이 명품을 생산하게 되고 스포츠 선수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 국가의 품격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국민들 개인의 삶의 품격이 바뀌지는 않는다.
가격과 규격은 국가가 정하고 관리할 수 있겠지만 품격은 사회 전체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향기에 가깝다. 품격이란 국가 프로젝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성숙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시점에 품격을 논하는 까닭은 국가와 사회의 덕을 회복하지 않고 공학적인 접근만으로는 현재 우리를 위협하는 환경을 바꿀 수 없고, 앞날도 전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례로, 미국이 품격을 상실했다고 보는 이유는 단순히 조지 부시 정부에 의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오만한 제국의 얼굴 때문이 아니라 이미 미국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비만한 제국의 모습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호 평화포험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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