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
세상읽기
보름 뒤에 있을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대북 압박을 강화한 가운데 주미 한국대사관이 미국 하원 관계자들에게 <태극기 휘날리며>와 <쉬리> 등 한국영화 디브이디를 선물했다고 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영상으로 전달하는 일종의 선전 외교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한국을 한국전쟁으로 기억하고 소위 워싱턴의 지한파조차 한반도 문제의 본질을 한국 쪽에 서서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나마 서울과 워싱턴의 ‘소통 장애’가 해소되면 다행이겠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북-미 관계의 고삐를 잡고 있는 워싱턴 정가의 실세 여론에 얼마나 먹힐지는 의문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상대국의 여론을 겨냥한 ‘퍼블릭 디플로머시’, 곧 선전 외교에 치중해 왔다. 국무부에는 전담 부서까지 있다. 현재 선전 외교 담당 차관은 칼 로브와 함께 조지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캐런 휴즈다. 그만큼 선전 외교를 중시한다. 냉전시대의 미국은 국력 차이가 엄청난데도 한국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선전 외교에 주력했다. 한국 엘리트층의 전통적 대미관은 이러한 외교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탈냉전 시대의 한-미 관계를 정치·군사 현안에만 국한시켜 조율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선전 외교처럼 한국도 한국에 대한 호감과 이해가 희박한 워싱턴을 겨냥한 선전 외교를 양국관계를 조율할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중국이나 동남아의 한류 열풍에는 흥분하면서도 정작 한반도 국제정치의 불가피한 상대인 워싱턴을 겨냥한 선전 외교는 염두에 없는 듯하다. 워싱턴을 ‘하나의 대상’으로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와 외교 관계가 없는 중국이나 소련 전문가만 있고 미국 전문가는 없는 현상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미국을 ‘한국의 대상’으로 보지 않던 냉전시대의 기형적 세계관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증거다. 친미 아니면 반미라는 개항시대의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한-미 관계를 전망하는 우스꽝스런 현실도 양쪽 모두 미국을 바깥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한-미 관계를 지향한다는 정치권의 큰소리가 공허한 까닭은 이것이다.
일단 한국은 워싱턴 정가와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미국을 이스라엘 편으로 유도해온 미-이스라엘 위원회(AIPAC)처럼 거대한 로비 세력을 조직할 힘은 없다. 그러나 미국내 유대계의 로비 때문에 미국 정부가 국익을 해치면서까지 친이스라엘 정책만 취해 왔고, 이것이 이슬람 반미주의의 원인이라는 대학의 연구보고서 하나에도 발끈하고 나서는 그들의 여론 조직력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 등 보수와 진보의 구별 없이 이스라엘 편향의 사설을 자주 싣고, <코멘터리>나 <위클리스탠더드>와 같은 네오콘 계열의 잡지는 물론 <뉴리퍼블릭>과 같은 반네오콘 계열의 잡지마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이스라엘을 옹호하면서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공론을 주도해 온 사례를 남의 일처럼 쳐다볼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미국 여론매체의 패권적 속성과 한-미 관계의 현 상황으로 봐서 당장의 성과는 어렵다. 그러나 여론은 외교의 대상이다. 워싱턴의 공론장에 한국의 입지를 세우기 위한 장기 포석 없이는 탈냉전 시대의 대미 외교도 없다. 샴푸 광고도 연작으로 때리는 세상이다. 워싱턴 주재 한국 대사가 뉴욕타임스 독자란에 투고하는 일회용 대증요법 외교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체계적 선전 외교부터 준비하라. 물론 상대는 미국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 첫 상대는 워싱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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