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총수 일가들이 기업을 이용해 세금 없는 대물림을 하거나 사익을 취해온 정황이 여러모로 드러났다. 참여연대가 민간재벌 38개 기업집단 계열사 중 250곳을 대상으로 1995년부터 10년 동안의 각종 거래 상황을 조사해 발표한 ‘38개 재벌 총수 일가의 주식거래에 대한 보고서’를 보면, 64곳에서 총수 일가의 사익을 위한 부당거래가 이루어져온 것으로 나와 있다. 거대 재벌에서 단편적으로 드러났던 편법 경영권 승계나 총수 일가의 사익 증대 행태가 대다수 재벌에서 이뤄졌다는 게 참여연대의 진단이다. 에스티엑스 같은 신흥 재벌까지 기존 재벌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재벌이 투명하고 부끄럼 없는 경영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기업이 되기까진 아직도 갈 길이 먼 모양이다.
총수 일가가 계열사와 사업 연관성이 밀접한 회사를 세운 뒤, 계열사가 할 사업을 몰아서 하면서 보유지분 가치를 높이는 ‘회사기회 편취’, 총수 일가 회사에 물량을 몰아주게 하는 ‘지원성 거래’, 싼값에 주식 또는 주식연계 증권을 총수 일가에 넘겨주는 ‘부당 주식거래’가 전형적 유형이다.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수법으로 자녀 재산을 불려 경영권을 이을 종잣돈을 만들어 주고, 총수 재산도 증식해온 셈이다. 참여연대의 조사만으로 모든 걸 재단할 순 없겠으나, 드러난 정황은 실태를 미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재벌총수 일가의 도덕성 결여 탓이 크다. 기업 재산을 사유물처럼 취급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적 이익 극대화에 몰두하는 천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다. 재벌가는 어떻게든 세금을 물지 않고 안정된 경영권을 넘겨주려 하나, 이는 사욕이고 기업의 존립 기반인 자본주의 질서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정당한 세금 없이도 대물림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우리 경제가 재벌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려서는 냉엄한 국제 경쟁을 헤쳐나가기 어렵다. 기업 관련 규제의 정상화도 상당부분 여기에 발목잡혀 있다. ‘반기업 정서’ 해소도 요원하다.
그러나 도덕성에만 기대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결국은 법과 제도를 정비해 합법을 가장한 편법이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게 관행과 의식으로 자리잡게 해야 한다. 상법은 물론이고, 편법 상속에도 세금을 물릴 수 있게 세법도 손봐야 한다. 참여연대도 ‘회사기회 편취 금지 조문 신설’등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일일이 따질 수는 없으나, 정부도 수용할 것은 전향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동안 이뤄진 편법 상속 과정에서 불법이 없었는지도 살펴야 한다.
현대·기아차그룹과 현대산업개발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에다, 더욱 불거질 재벌가의 부당거래 논란 등으로 재계가 불편해하고, 이게 단기적으로 경제에 악재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통이 있더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다. 환부를 도려내는 아픔 없는 큰 수술이 어디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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