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단국대 교수·기생충학
야!한국사회
내가 고3이던 어느날, 학교에 가려는데 입고 갈 바지가 없었다. 그새 키가 컸는지 바지가 짧아져 못 입게 된 탓이다. 옷 없는 애들이나 입는 교련복 차림으로 학교에 가려니 부아가 났다. 공부하느라 힘든 아들한테 바지까지 신경 쓰게 하다니! 엄마에게 넌지시 바지 얘기를 꺼냈더니 “바지가 많은데 왜 그러냐?”는 힐난이 돌아온다. 그로부터 보름이 넘도록 난 교련복을 입고 다녔고, 엄마가 속상하라고 공부를 일체 안 해 버렸다. 네이버 사전을 보면 ‘무엇이 마땅치 않거나 불만이 있을 때 떼를 쓰며 조르는 일’을 투정이라 한다던데, 고3인 내가 텔레비전만 보고 공부를 안 한 건 전형적인 투정이었고, 내가 그랬던 것은 엄마가 바지를 안 사줬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우리나라에서 총리는 얼굴마담이었다. 괜찮은 사람이 국면 전환용으로 기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더 오염될 게 없는 사람들이 말년에 한 번씩 들르는 자리가 총리직이었다. 그러다 인사청문회가 도입되었고, 첫 번째로 걸린 사람이 바로 장상씨다. 한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뻔했던 장씨는 땅투기 사실이 드러나면서 낙마하고 만다. 여성계에서는 “그 전 총리들은 장씨보다 훨씬 부패했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인사청문회 덕분에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는 사람이 총리 되기가 어려워진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새 총리로 한명숙씨가 지명되었을 때, 난 “드디어 될 만한 분이 총리가 되는구나!” 하고 기뻐했다. 민주화 투쟁 경력을 가졌고, 인품으로 보나 장관 재직 때 보여준 업무 능력으로 보나 한 내정자의 자질은 총리가 되기에 차고도 넘친다. 그런 훌륭한 분을 총리로 맞이하도록 이해찬 전 총리는 삼일절에 그렇게 골프를 쳤나 보다. 그런데 한나라당에서 한 내정자를 반대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다름아닌 열린우리당 당적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물론이고 지자체 장들도 다 당적을 갖는 판에 총리의 당적이 왜 문제가 될까? 대체 그들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반대를 하는 걸까? 표면적인 이유는 당적이지만, 실제 이유는 그냥 한 내정자가 싫은 것일 게다.
혹시 한 내정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까. 최연희 의원 사건을 비롯해 한나라당에서 터져나온 반여성적 사건들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그럴 법한 가설이다. 대놓고 “여자라서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엉뚱한 걸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털어봐야 먼지 한 점 날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우려먹어 씨알도 안 먹힐 사상검증을 하자고 할 수도 없고. 결국 인사청문회 특위 구성마저 거부한 채 버틸 수밖에.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하면 인사청문회를 해야 하는 게 국회의원의 의무다. 입고 갈 바지를 안 사준다고 공부를 안 해 버렸던 나처럼, 한나라당은 지금 열심히 투정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어릴 때 투정을 부리면 과자라도 얻을 수 있지만, 다 커서 부리는 투정은 대개 결과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내 경우를 보자. 그렇게 보름 동안 공부를 작파한 끝에 엄마는 결국 멋진 바지 둘을 사주셨다. 그 대가는 컸다. 너무 오래 놀아버린 탓에 난 중간고사를 망쳤고, 뒤이어 본 모의고사에서도 그 전보다 이십 점 이상 성적이 떨어지고 만다. 뒤늦게 삭발을 하고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잃어버린 보름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한나라당도 마침 5월31일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지금 투정에 한창인 그들이 받게 될 지방선거 성적표는 어떤 것일까.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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