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런던대 박사·경제저널리즘
경제전망대
기업주들의 행태를 관찰하다 보면 창업주·2세·3세 사이에 각기 다른 특징들이 발견된다. 창업세대는 타고난 근면과 검약, 창의성과 집념으로 대그룹을 일군 만큼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정경유착이 있었지만, 개발연대 한국경제를 이끄는 데 앞장섰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자부심은 종종 ‘내가 몇 십만 명 먹여 살린다’는 ‘대부 신드롬’으로 전이되고, 그게 도지면 ‘나라를 구하겠다’는 ‘대통령병’이 된다.
2세들은 대개 근면하다는 점에서 창업주들을 닮았다. 창업주의 엄한 훈도 아래 성장하면서 기업성장의 일익을 담당한 이들이 많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하면 된다’는 정신이 무리한 ‘기업확장 신드롬’으로 나타난다. 상속에서 형제간 우위를 점하려는 포석, 또는 2세 경영자로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행태일 수도 있다. 산업 발달이 이미 성숙단계에 와 있어 신규진출이 어려운 탓에 주로 인수를 통한 기업확장에 매달린다. 삼성이 ‘남이 어렵게 만든 기업 곤궁할 때 인수하지 마라’던 선대 회장의 가훈을 무릅쓰고 ‘기아 흔들기’에 나섰다가, 현대 좋은 일 시킨 것은 한 사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은 경영혁신으로 기업을 더 발전시킨 사례도 많아 싸잡아 평가할 수는 없다.
문제는 3세다. 예외도 있지만, 창업주와 2세의 ‘기업가 정신’을 승계받지 못하고 거대그룹을 이끌기에 부적절한 자질을 지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다. 아들에게 엄하던 창업주들에게도 3세는 그저 ‘귀여운 손주’다. ‘유학’이니 ‘현장경험’이니 로열젤리를 먹이며 제왕학을 가르친다 해도 대개 부질없는 짓이다. 어떤 3세는 유학 시절 누가 리포트를 담당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현장경험’을 쌓도록 각급 직위에 잠깐씩 배치되지만, 감히 누가 황태자에게 쓴소리를 하랴. 상관에게 눈물이 핑 돌도록 혼쭐나고 동료들과 쓴소주 들이켜는 ‘체험, 생존의 현장’이 아니라,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고 소수의 측근을 만드는 시기가 되기 십상이다.
재벌 홍보실은 하나같이 3세의 경영능력과 예의 바른 품성을 선전한다. 3세가 맡은 기업을 그룹이 총력으로 지원하기에 스스로도 경영능력을 과신하고 ‘거물’이 되어간다. 역경을 헤쳐나간 경험이 없어 나약한 듯하지만 자기중심적이어서 쓴소리 하는 사람 내치고 잘못된 결정을 밀어붙일 위험이 있다.
재벌과 우리 사회의 불화와 불행은 이런 3세들에게 경영권을 세습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3세가 경영에 참여할 무렵이면 공개기업은 대규모 자본유입으로 이미 공적기관이 돼 있는데도 경영권을 대대손손 사유화하려 한다. 현대·삼성·신세계의 탈세·편법승계 논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모든 병이 그렇듯이 재벌의 ‘황태자병’도 스스로 고치기는 어렵다. 관습의 병을 예방하는 묘약은 제도 정비와 엄격한 법적용이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실제 지분 이상의 경영권 승계를 제어하는 출자총액 제한마저 풀겠단다.
록펠러, 멜런, 카네기, 밴더빌트, 스탠퍼드 …, 미국의 부호들이 후손의 지분 또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남은 것은 그들이 특별히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다. ‘3대 가는 부자 없다’는 우리 속담도 알 턱이 없다. 핸콕과 더비 가문 등은 세습경영을 시도하다 후손의 무능과 제도의 덫에 걸려 몰락했고,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미국은 분식회계를 한 월드컴 회장에게 25년 징역을 선고했다. 단 25일 구류처분도 없이 경영에 복귀하는 사례가 반복된다면, 한국 자본주의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이봉수 /영국 런던대 박사·경제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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