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논설위원
아침햇발
‘영화의 망명’이라고 해야 할까. 꽤 낯선 일이 벌어질 판이다. 한국 영화산업을 이끄는 50인에 들어간다는 김기덕 감독 이야기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지난주 〈씨네21〉에 쓴 글을 보면, 김 감독이 새 영화 〈시간〉의 국내 상영을 단념할 모양이다. “보고 싶으면 외국에서 수입해 개봉해야 할 거”라고 했단다. 그는 지난해 시사회도 치르지 않고 〈활〉을 개봉했는데, 온 나라를 통틀어 고작 1450명이 봤다고 한다. 그래서 새 영화는 아예 국내 극장에 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열기가 여전한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을 어떻게 봐야 할까. 스크린쿼터도 대중적인 인기가 없는 영화는 지켜주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주류 영화만을 위한 거라고 정리하면 매끄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현실을 간단히 재단하는 건 진실을 외면하거나 감추는 결과만 가져온다. 사태의 진실은 얽히고설킨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만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김 감독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한 두 명의 영화감독이 있다. 노동 문제에 집중하는 이른바 ‘독립영화’ 감독들인데, 이들은 웬만해서는 영화를 거저 보여주지 않는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원봉사 식으로는 한계가 명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빚더미에서 벗어날 길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10여명을 위한 상영회조차도 함부로 하는 일이 없다. 직접 온갖 장비를 싸들고 가서 상영 전날부터 설치하고 점검한 뒤에야 영화를 튼다.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들을 보노라면, 그들에게 영화는 ‘삶의 진실을 폭로하는 무기이자 예술’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의 영화가 특수한 경우에는 사회적 상황, 심지어는 소유질서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한 발터 베냐민의 말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하지만 영화자본의 힘이 막강한 지금 이 ‘특수한 경우’는 차라리 ‘영화의 외부’, ‘자본의 외부’다.
‘문화상품’이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영화 또한 상품이라는 건 상식이다. 아니, 영화만큼 자본의 뒷받침 없이는 성장할 수 없는 예술도 드물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시대 예술의 죽음을 논하는 건 과잉이다. 리사 자딘의 〈상품의 역사〉라는 책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예술은 이미 소비의 대상이자 상품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시대의 화가들은 권력자에게 봉사하는 장인이었다. 오죽하면 당대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상인용 돈지갑을 목에 건 모습의 초상화를 주문했다고 한다. “저명한 인물이 되려면 상품의 세계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자본과 시장의 확대 덕분에 예술이 일정한 독립성을 얻은 측면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대중적 수요가 생기면서 권력의 후원 없이도 존립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저런 이유로 이 땅의 대중과 멀어진 김기덕 감독이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외국 시장’ 덕분 아닌가.
진짜 문제는 틈새 시장마저 허락되지 않는 영화, 상품 시장에 편입되는 순간 생명이 끊기는 영화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에 희망을 거는 건, 이 싸움이 저런 영화들까지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미국 영화 상품이 거침없이 밀려들어올 때 마지막 피해자는 경계선 끄트머리에 놓인 영화들이고, 때로는 영화에서 재미뿐 아니라 예술이나 삶의 진실을 찾으려는 영화인과 관객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싸움 속에서 영화인들이 시장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 노동자들을 만나리라는 ‘근거없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