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1 18:26
수정 : 2005.02.21 18:26
히말라야에서 살아 돌아온 박정헌·최강식 두 산사나이의 이야기는 코끝을 찡하게 한다. 이들은 지난달 험하기로 이름난 촐라체 북벽을 올랐다 내려오던 중 얼음벽 틈새로 빠지고 뼈가 부러졌으나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로프를 연결한 채 하산하던 둘은 앞서가던 최씨가 발을 헛디뎌 악마의 입 같은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생사의 고비를 맞는다. 순간 정신을 잃은 박씨는 자신마저 빨려들어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줄을 잡아당겼다. 그 충격에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2시간 동안 허리가 부러져나갈 것 같은 고통을 견디고 최씨도 필사의 탈출을 벌여 사지를 빠져나왔다.
암벽 등반에서 로프는 생명줄이고, 몸을 이은 ‘자일 파티’는 목숨을 나눈 동지다. 박씨의 몸무게는 70㎏이었지만 끌어올려야 할 최씨는 78㎏이나 됐다. 혹한의 추위도, 뼈가 부서지는 아픔도 둘을 연결한 생명줄을 끊지 못했다.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일 파티는 내쳐야만 살 수 있는 ‘목에 댄 칼’이기도 하다.
페루 안데스의 시울라 그란데에서 사이먼 예이츠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수직의 빙설벽을 앞서 내려가던 조 심슨이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며 크레바스에 빠진다. 줄을 쥔 사이먼의 몸도 거의 설사면 밖으로 튀어나오려 한다. 다음 순간 확보 지점은 파괴될 것이고, 그러면 두 사람 다 이승 저편으로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사이먼은 최후의 순간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 칼을 갖다대자 로프는 ‘툭’ 하고 끊긴다.(조는 기적적으로 생환한다)
스스로 자일을 끊은 경우도 있다. 하산하던 자일 파티 하나가 아이젠을 떨어뜨렸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에서 아이젠 없이 하산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방법은 단 하나, 아이젠을 갖춘 리더가 피켈로 얼음을 깎아 스탠스를 만들어주면서 하산하는 것이다. 속도가 너무 느려 절망적이었다. 리더는 어느 순간 뒤로 이어진 자일이 느슨하게 풀려 있는 것을 느꼈다. 아이젠을 잃어버린 자일 파티가 그를 살리려고 스스로 자일을 끊은 것이다.
자일 파티가 있음으로써 등반가들은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는 듯한 고산을 오른다. 로프보다 더 끈질긴 동료애로 극한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최후의 선택으로 자일을 끊는 행위는, 윤리 논쟁을 낳기도 하지만, 뼈마디를 으스러뜨리면서 자일을 움켜쥔 것만큼이나 인간적이다. 역설적으로 최후가 아니면 놓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음으로 해서 자일 파티는 불가능한 꿈을 이뤄낸다.
해발 수천미터의 가혹한 조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상의 생존 여건도 팍팍하기 이를 데 없다. 고용 불안이 심화되고 비정규직화가 가속화하면서 빈곤층, 신용 불량자가 크게 늘고 있다. 실업과 불황의 크레바스는 갈수록 아가리를 더 크게 벌리고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자일 파티가 없다는 것이다. 조직의 보호막은 사라졌고, 사회는 집단 이기주의로 찢어져 있다. 그나마 있는 자일도 내치고 끊기에 바쁘다. 사투의 끝이라면 차라리 행복에 겨워할 터이다.
실직, 신용불량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신뢰의 위기다. 신뢰는 사회적 연대감에서 솟아나며 연대감은 사회정의와 동전의 양면이다. 사회 연대의식이 옅어질 때 믿음이 사라지고 장래는 불안해진다. 공자도 일찍이 나라에는 경제보다도, 군사보다도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권위주의 물이 빠지는 것과 함께 시장의 고삐가 풀린 탓이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경제 지상주의가 새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왜 살인을 했느냐는 물음에 영화 〈콜래트럴〉의 비정한 청부 살인업자는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총알이 죽였어”라고 말한다. 변화의 방향이 내다보인다. 사회 변화의 핵심은 인간관계의 변화다. ‘경쟁과 효율’은 이미 과잉이다. 지금 우리에게 목마른 것은 ‘연대와 공존’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5일 취임 두 돌 연설에서 소득 2만달러의 장밋빛 공약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크레바스가 널린 하산길에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은 자일이 필요하다. 민주화를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와 내가 자일 파티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록 등반가들만큼 고결하고 초월적이지는 못하더라도.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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