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객원논설위원
객원논설위원칼럼
연금 개혁은 대의민주주의 정치라는 맥락에서 보면 매우 독특한 영역이다. 정치노선을 달리하는 정권이 집권하면 당연히 경제사회정책을 바꾸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하지만 수십년에 걸친 프로젝트인 연금은 경제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이는 합의의 정치를 필요로 한다. 즉 연금 개혁은 대의민주주의의 논리와 연금제도의 논리가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대의민주주의 원리에 충실하게 연금 개혁 문제에 접근한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연금정책이 대폭 수정되었다. 그 결과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연금제도를 갖게 되었다’. 이는 필자의 진단이 아니라 영국 연금위원회의 결론이다. 2005년 영국 학술원이 연 학술대회의 주제가 ‘왜 연금제도가 잘못되어 왔나?’였고, 영국 연금제도의 위기에는 연금 개혁에 대한 정파적 접근이 큰 몫을 했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 유럽 7개국의 연금 개혁 사례를 연구한 국제노동기구 보고서에서도 영국은 정권교체가 일어날 때마다 연금정책이 바뀜으로써 연금체계 전반에 대한 신뢰문제를 야기한 유럽에서는 예외적인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스웨덴과 스페인은 ‘초당파적인 합의’로 연금 개혁을 한 나라다. 1984년에 시작된 스웨덴의 연금 개혁은 10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94년 보수연합 정권에서 사회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었을 때 사민당은 의회에 설치되었던 연금개혁위원회의 인적 구성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결국 98년 그 위원회의 제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연금 개혁 문제로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졌던 스페인은 95년 각 정파가 연금 문제를 선거쟁점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한 ‘톨레도 협약’을 체결하였고 97년 연금 개혁에 성공하였다.
국민연금의 일관성 유지를 위해 근본적 개혁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80~90년대에 유럽 각국이 대대적 연금 개혁에 착수한 것은 기존 연금제도를 뒷받침하던 경제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국민연금을 설계할 때 가정했던 노동시장과 인구구조가 완전히 바뀌고 있기 때문에 혁신적인 재설계가 필요하다. 때문에 복지부는 변화된 경제사회구조를 반영하여 향후 수십년 동안 기본 틀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신중한 자세로 연금 개혁에 접근해야 한다. 근본을 바꾸지 않은 채 5년마다 하는 재정재계산을 통해 점진적 개선을 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은 영국처럼 연금의 신뢰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스웨덴과 스페인의 연금 개혁이 주는 교훈은 공적 연금의 근본적 개혁은 초정파적 합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열린우리당은 기존의 국민연금 개혁안이 사각지대 해소와 과도하게 적립되는 연금기금 문제를 해결할 설득력 있는 해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여당이라는 이유로 이를 맹목적으로 지지했던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한나라당도 기초연금 제도의 재원조달에 대해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연금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의구심을 해소하기 어렵다.
여야 서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대화와 타협의 정치의 상징은 보이지 않는다. 여야 지도부가 국민연금 문제를 정치쟁점에서 제외하겠다는 선언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좀더 차분하고 합리적인 연금개혁 논의의 돌파구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수십년 앞을 내다봐야 하는 국민연금 개혁은 합의 정치의 대표 상품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고 현재의 상황은 이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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