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
우리 세대는 우리 자신을 ‘엽전 바지저고리’로 낮추어 보면서 살아왔다. 그것은 우리 삶의 시간과 마당이 우리를 위축시켰던 불행한 역사 현실이었기 때문이리라. 나 자신 일제 때와 광복 후 그 혼란의 시기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 다닐 때 6·25 전란이 터졌다. 이승만 문민 권위주의 시대를 아프게 보내고 긴 군사 권위주의 시대를 울적하게 겪으면서, 우리의 정체의식은 더욱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국가와 사회, 인권을 탄압하는 정부, 온갖 편법주의가 난무하는 후진국의 이미지가 우리를 괴롭혔다. 이런 불행한 상황에서 자조적인 자화상은 잡초처럼 번졌던 것이다. 그러기에 국제무대에 나가서도 자연히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민주주의라는 장미꽃이 도무지 필 것 같지 않은 부끄러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엽전 바지저고리 의식을 갖게 되었으니, 그것을 어찌 무리라고 탓할 수 있겠는가.
헌데 지난 10년 동안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인식 속에는 뻗어가는 한국 이미지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의 유수한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는 특집보도에서 미국이 이제껏 누리고 있는 세계 지배력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다. 미국의 우월적 지위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 주로 중국, 인도, 그리고 한국에서 오고 있다고 했다. 제1 인터넷 혁명은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아이비엠, 인텔 등이 선도했으나 제2 혁명은 한국의 삼성과 엘지 등이 이끌 것임을 인정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점증하는 경제성장이 미국으로서는 테러보다 더 심각한 도전임을 또한 시인했다.
세계 최고의 기업인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이 한국기업을 본받고 있는 것, 그것 또한 엄연한 오늘의 현실이다.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한국 정보기술의 생활화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세계가 한국에 크게 신세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판 <오마이뉴스> 같은 새로운 인터넷 신문을 경영하고 싶어한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엽전 바지저고리 의식은 이미 사라졌다. 지난번 세계야구클래식(WBC)에서 우리는 그 막강한 미국 야구팀을 꺾었다. 일본도 놀라게 했다. 쇼트트랙, 양궁, 여자프로골프(LPGA)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인의 모습은 정말 눈부실 정도로 활기차다.
이런 우리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밖에 나가 보면 대번에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귀국하여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노라면, 우리가 아직도 엽전 바지저고리 수준을 결코 넘어서지 못했음을 슬프게도 다시 깨닫게 된다.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않고 상대방 눈에 있는 티를 서로 뻥튀기하는 데 분주한 우리의 모습에서 우리의 후진성을 새삼 다시 보게 된다.
문제는 기성세대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을 움직이고 부릴 수 있는 힘을 가진 기성세대에 있다. 특히 정치와 언론의 권력은 활기찬 새로운 한국인의 이미지를 심어주기는커녕 우리의 열등감을 짐짓 조장하는 듯하여 안타깝다. 지난 세계야구클래식이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박찬호 선수는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고백했는데, 왜 정치에서는 그러한 고백이 나오지 못할까.
언제 우리의 정치가 우리의 야구나 축구의 수준에 오를 수 있을까. 언제 그들이 우리 젊은 한류의 주인공들 수준에 오를 수 있을까. 왜 우리 정치계에 정말 감동을 주는 스타가 없는가. 사실 스타 중의 스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바로 그 정치 분야에서 먼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비로소 나라의 장래가 더욱 밝아지는데 말이다.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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