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객원논설위원
우리 사회에서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못 다 이룬 꿈을 자녀들의 이름에 담아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나 후배의 아이들 중에 ‘동혁’(東革), ‘승혁’(勝革), ‘민주’(民主)라는 이름들은 모두 그렇게 지어졌고, 우리 집 큰아이 이름도 그 무렵에 많이 읽었던 ‘님 웨일즈’가 쓴 김산의 일대기 <아리랑>에 등장하는 수많은 활동가들의 이름에서 골랐다. 아내는 진통이 시작돼 병원에 가면서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진통이 찾아오는 사이 사이에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분만실로 들어갔다.
대학에서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에도 그런 이름이 가끔 눈에 뜨인다. 지난 학기 첫 수업시간에 출석을 부르다가 한 학생에게 무심코 물었다. “부모님이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하셨나요?” 그 학생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기말시험에서 “미래 사회 노동자로서 자신의 대학 생활을 한국 사회 정체성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스스로 평가하시오”라는 문제를 냈다. 출제자인 나로서도 도대체 정답을 알 수 없는 생뚱맞은 문제였다. 학생들에게는 “이 문제의 배점이 가장 높다”고 강조했다.
며칠 전, 밤 새워 채점을 하다가 나는 몇 번이나 손을 놓고 숨을 골라야 했다. 한 학생이 길게 쓴 답안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살아오는 동안 정말 누구보다도 싫었던 사람이 있다면 내 어린시절의 아버지다. 출석을 부르던 교수님이 내 이름을 보고 ‘부모님이 노동운동을 하셨느냐?’고 물으셨다. 그렇다. 그 시절 아버지는 노동조합의 위원장이셨다. 그때 아버지는 장기파업을 하시느라고 집안일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셨고 그래서 어머니는 편찮으신 몸으로 식당 일을 나가셔야 했다. 집에는 언제나 동생과 나뿐이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싫은 기억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국사회와 노동문제’ 강의를 듣던 날, 그날 저녁 아버지와 같이 술을 마셨다. 이제야 아버지를 이해했다고 …. 어느덧 어깨가 좁아진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아무 말 없이 웃어주셨을 뿐이다.”
놀랍게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답안을 쓴 학생들이 많았다. “야근을 하고 새벽 두 시에 들어와 다섯 시에 다시 일하러 나가시는 아버지가 푸념을 늘어놓으실 때 ‘그럼 그만두시면 되죠’라고 말하던 철없는 딸에게 지어주시던 아버지의 쓴웃음을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는 학생도 있었고, “부모님이 모두 노동자인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지금까지 노동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다”거나 “나도 노동자가 되리라는 것을,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한탄하는 내용을 적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국민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노동문제에 대한 몰이해 현상이 학생들의 잘못은 아니다. 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의 잘못이다. 화초가 잘 자라지 못한 것은 정원사의 책임인 것처럼 …. 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진실을 전달하고 가르치려고 애쓰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감사한다.
“공부방 교사, 도시락 배달, 독서토론, 농활, 국가보안법 철폐 농성, 평택 대추리 방문 등으로 점철된 나의 대학생할은 부모님과 교수님들이 보시기에 에프(F)학점이겠지만 스스로 평가할 때는 에이플러스(A+)다”라고 적은 학생도 있었다는 것을 ‘희망의 약속’으로 전한다.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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