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제헌 이래 개헌은 매번 비상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예외없이 권력자가 총칼을 앞세워 강제했거나, 민중의 힘에 밀려 이뤄졌다. 모두 정권의 연장이나 전복과 관련돼 있었다. 논의만으로도 긴장이 조성되는 이유는 이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헌법은 국가의 정체성, 국가 운영의 원리와 틀을 규정한 최고의 규범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걸맞은 헌법을 가져보질 못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제된 상황에서 개헌이 이뤄진 탓이었다. 6월 항쟁의 산물인 지금의 헌법도 마찬가지다. 정치권은 6월항쟁의 요청인 민주화를 최저 수준으로 수용하는 선에서 미봉했다. 민주세력과 독재세력의 희한한 절충이었으니 한계가 분명했다. 절충을 대행한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의 제도화보다 대권 욕심이 앞섰으니, 그 수준은 더욱 낮아졌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대통령 직선, 5년 단임제다.
이 헌법의 한계는 시행과 함께 곧 현실로 드러났다. 정치권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바로 차기를 겨냥한 정쟁을 시작했다. 야당은 단임 대통령의 실패를 유도하기 위해 벼랑끝 투쟁을 벌였다. 대통령은 단임이기에 임기 중반만 지나면, 레임덕에 걸렸다. 여권은 분열하고 공직자는 줄서기에 들어갔다. 대선과 총선의 시기상의 불일치는 레임덕을 가속시켰다. 유권자의 견제심리는 (탄핵정국 속에서 치러진 2004년 선거를 제외하고) 총선 때마다 여소야대의 국회를 탄생시켰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이중권력은 국정의 난맥을 부채질했다. 이 과정에서 국정운영의 비효율과 집권세력의 무능은 제도화됐다. 87년 이래 집권당이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 혹은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바뀐 것이나, 그때마다 후임자가 전임자를 밟고 일어서야 했던 것은 그로 인한 결과였다. 정파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제 정신이라면 누가 이런 권력구조를 유지하자고 할까.
하지만 한나라당이 지금 개헌 논의를 회피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권이 개헌을 빌미로 지금의 정치 지형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현 상태라면 차기는 따논 당상인데, 한나라당이 그런 혼란을 무릅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엔 개헌을 회피할 이유보다 적극 추진해야 할 이유가 더 많다.
첫째, 국민의 처지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대통령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게 중요하다. 대통령의 실패는 국민의 고통으로 직결된다. 지금의 권력구조 아래서는 세종대왕이 나와도 실패하기 십상이다. 둘째, 한나라당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선진화를 국가적 목표로 세우고 있다. 그러나 5년 단임제에선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셋째, 수권세력이라면 국가적 의제를 설정하고,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가장 절실한 의제는 개헌이다. 방어적 자세를 취하면서 수권정당을 자처할 수 없다. 오히려 개헌의 주도권을 쥐는 게 대선에서도 백번 유리하다. 넷째, 현재의 정치지형상 여권이 부릴 꼼수는 없다. 여권은 개편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다섯째, 87년 체제는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반민주 정권의 부정이었다. 한나라당의 모태에 대한 거부를 통해 탄생한 것이다. 옛 여권의 본류가 매번 당명을 바꿔가며 탈피를 시도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모태로부터의 탈피는 87년 체제의 극복 없이는 불가능하다.
마지막. 국가적 과제라도, 한나라당이 거부하면 개헌은 불가능하다. 당파성 강한 충고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87년 체제의 완성이나 극복은 시민사회의 꿈이다. 이룰 수 있는데 회피하는 건 이들에 대한 죄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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