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객원논설위원
객원논설위원칼럼
한국 노동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산업별노조의 출범이 가시화하고 있다. 기업별노조와 산별노조는 노동자 사이의 사회복지 수혜에 차별적 영향을 끼친다.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된 1987년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기업복지 수준의 격차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03년에는 1000인 이상 대기업의 근로자 1인당 기업복지 비용이 77만9천원인 반면에 10인~29인을 고용하는 영세기업은 18만9천원으로 격차가 네 배 이상 벌어졌다. 이 현상은 개별 기업에 많은 복지비용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기업별노조 체제가 낳은 결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연금과 의료보험 등의 사회보험은 물론 기업복지에서 극심한 차별 대우를 받는 비정규직의 복지문제도 정규직 위주의 기업별노조 체제가 낳은 부작용이다.
기업별노조 체제에서 기업복지가 발달하면 할수록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연대적 복지제도의 발달이 지체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전국민 의료보장제가 없는 미국이다. 역대 미국의 민주당 정권은 케네디, 카터,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전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실패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이미 기업복지 차원에서 민간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었던 미국 노동운동의 소극적 대응이었다. 의료문제에 별 아쉬움이 없던 미국의 조직노동자들이 다른 계급·계층에 대한 의료보험 확대에 소극적으로 일관함으로써 의료개혁의 사회적 동력이 상실된 것이다.
기업별노조는 조직화된 일부 노동자에게 복지혜택을 집중시킴으로써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를 확대시키는 태생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 반면 산별노조는 노동자 사이의 복지혜택의 차이를 줄여줄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반이 될 수 있다. 단위 기업의 노조가 개별 사용자에게 주택문제 해결을 요구하면 주택수당이나 사택이 제공되어 특정 기업의 근로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가지만 산별노조 체제에서는 이 요구가 국가의 공공주택 확대로 이어져 전체 국민의 혜택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산별노조가 사회적 차원에서 전국민의 복지문제를 적극적으로 대변함으로써 다른 계급·계층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더 나아가 노동운동의 정치 세력화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데 스웨덴의 노동운동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회복지 문제는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이제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벌어져가는 기업간, 산업간 임금격차를 해소할 획기적인 시장적 대안이 없는 이상 간접적인 임금인상 효과가 있는 공공주택, 공공의료, 공적연금 등 연대주의적 국가복지 제도의 확대를 통해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문제에서 보듯이 노동자 내부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운동의 조직화와 정치세력화는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1등 노동자와 2등 노동자의 차이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노동자 내부의 연대는 물론 다른 사회집단과의 연대는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
산별체제가 의미있는 이유는 단위 기업에서의 이해관계 추구에 매몰되어 있는 노동자의 인식구조를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사회구조의 거시적 개혁에 노동이 좀더 강력하게 개입할 공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시적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중앙조직과 실리 추구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단위노조 사이의 모순은 한국 노동운동의 구조적 문제점이다. 산별체제의 출범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조직노동자의 단기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전국민의 보편적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사회복지 전략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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