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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7 19:09 수정 : 2005.02.27 19:09

아버지는 아래 입술을 지그시 깨무셨다. 그것은 하고 싶은 얘기를 감추고 계시다는 뜻이었다. 집 안에서는 큰 소리가 나는 법이 없었고, 세월이 지나 아버지가 부재한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침묵이 이끌어온 그 분위기가 그립다. 말없이, 묵묵히,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아픔을 담아내는 것이 꼭 방 한쪽에 놓여있던 아버지의 재떨이를 닮았다.

말이 무성하고, 주장이 난무하고, 마치 익명의 공간을 현실로 돌려놓은 것처럼 책임 없는 공방전이 계속될 때면 아버지의 재떨이에서 한줄기로 가만히 피어오르던 담배연기가 생각난다. 때로는 알고도 말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한 번쯤은 돌이켜 생각해보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개인의 일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뭐’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고, 그것이 국가와 공동체에 관련된 일이라면 ‘내 잘못은 없는가’ 하는 관조의 시간이 필요하다.

개혁과 변화라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온 우리 사회는 지금 정신적 성숙도를 가늠해보는 자리에 와 있다. 웰빙의 열풍이 우리의 등을 떠밀어 건강과 즐거운 생활이 삶의 질을 담보하는 듯 보이지만 기실은 육체적 건강만큼 더 중요하게 정신의 건강에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권위를 극복했고, 대중의 지위가 상승했고, 디지털과 인터넷은 정보의 독점을 차단해가고 있으며, 일방향으로 전해지던 말들이 다방향의 환경에서 더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책임의 문제, 집단 간의 갈등문제, 주류와 비주류의 해체가 가져오는 정신적 공황상태들을 여전히 누군가는 교통정리해 주어야 한다. 더군다나 정답 없는 문제제기가 계속될 때 누군가는 침묵을 통해 말의 성찬에서 한 발 비껴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주장이 많아지던 나에게 아버지가 보여준 것은 침묵이었다. 그 침묵의 의미를 되짚어가면서 비로소 갈등은 이해와 화해로 변해갔다.

침묵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입속에서 한 움큼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가 아닐까 싶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Pipes of Peace’를 노래한다. “전쟁의 불길 대신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자, 어떻게 우리가 평화의 담배를 돌려 피우는지를 보여주자”고. 인류는 단 하루만에 이 행성을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또 지킬 수도 있다고, 그래서 사랑의 불을 킨다고.

폴의 이 노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숙연한 의식 속에서 나왔다. 그 대평원의 주인들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들과 함께 공유했다.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수많은 사연들조차 말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교감하고자 했다. 그들이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따라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으며 평화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또한 담배를 피우는 동안 모든 말은 금지된다. 따라서 평화는 침묵을 통해 비로소 확인되는 고귀한 행위였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모든 인간사에 있어서 특히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 시기 “우리의 진정한 승리를 위해 지금 총알보다 담배가 더 필요하다”고 한 사람은 존 퍼싱 장군이었다. 노동의 짧은 휴식시간에 햇볕이 비추는 담벼락 주위에서 서로를 위로했던 것도, 고성이 오가던 젊은 날의 열정을 잠시 식혀주었던 것도 바로 하얗게 뿜어져 나오던 담배연기였다. 또 그 사이를 지나간 지난날의 침묵이었다.

가끔은 아버지의 담배냄새를 다시 맡고 싶다. 가난한 살림을 탄식하던 어머니의 잔소리도 그 연기 속에 묻혔었다. 사춘기를 지나던 누님의 예민함도, 이웃들의 빈번한 다툼도 모두. 물론 그것은 침묵의 힘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침묵하는 이들이 더 많다.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가족의 아픔과 사회의 아픔을 삭이는 저 홀로 삭이는 이들이 더 많다. 평화는 거기로부터 온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의 침묵을 위하여 나는 전쟁의 불 대신 작은 불을 붙인다.

신동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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