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01 18:08
수정 : 2005.03.0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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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 궈뱌오 베이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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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겨레〉의 권유로 이 난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 신문에 칼럼을 발표하는 건 처음이다. 나의 글에 동의하지 않거나 비판하는 한국 독자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를 신문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나의 사고가 다른 사회·문화에서 나온 사고와 모순이 있다면 기꺼이 토론과 대화에 응할 것이다.
최근 두 명의 한국 독자로부터 내 글(‘한국과 일본은 사명이 있다’ 1월25일치)에 대한 이메일을 받았다. 두 분은 모두 실명을 밝히고 중국어로 메일을 보내왔으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자신을 “교수도 정치가도 아닌 일반 백성”이라 소개한 김씨 성의 남자와, “50대 주부”라고 밝힌 이씨 성의 여자 분이 보낸 메일은 내게 한국과 아시아에 대해 다시금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우선 한국 독자로부터 중국어로 된 메일을 받은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한국에 가보지 못했지만 사회주의 중국과 자본주의 한국의 거리가 최근 급격하게 좁혀지고 있다는 것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내가 교편을 잡고 있는 베이징대학의 외국 유학생 가운데 한국 유학생이 가장 많다. 2위가 일본 유학생, 3위가 동남아 화교의 후예다. 한국은 경제대국 일본이나 화교보다 많은 유학생을 중국에 보내고 있다. 내가 속한 신문전파학원(신문방송학과)에도 한국 유학생이 가장 많다. 내가 가르친 한국 학생도 십여명에 이른다.
두 독자의 메일을 통해 나는 한국의 일반 백성들이 중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는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나는 베이징의 한국인 친구로부터 한국의 정치 상황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의 인권 상황은 1980년대 한국의 인권 상황과 닮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모든 언론은 검열 당했고 백성들은 독재정치의 희생물이었다. 나는 88년 이후에 비로소 한국이 점진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80년 광주 학살에 관한 〈타임〉 〈뉴스위크〉 등 미국 매체의 보도가 모두 잘려나간 채 한국 독자에게 전달됐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와 똑같은 일이 중국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달 17일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를 지낸 자오쯔양이 서거했다. 다음날 베이징 주재 한국 기업과 언론기관 등에 배달된 한국 신문의 자오쯔양에 관한 보도가 모두 가위로 잘려나간 채 배달됐다. 세계의 독재자들은 아이디어가 다 비슷한 모양이다. 나는 한국의 백성들이 중국의 사회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일종의 동병상련 때문이라고 여긴다. 막 독재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아직 그 굴을 다 통과하지 못한 이들에게 더 각별한 마음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민주주의에 관해 한국과 일본이 좀더 많은 구실을 떠맡아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김씨 성의 독자는 동의를 표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책임감이 부족해 실망스럽다”고 썼다. 이씨 성의 독자는 나의 관점을 비판했다. 그는 “중국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의 달라진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의 지식인은 자기 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스스로 노력해야지 외부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중하지 못한 행위”라는 것이다.
나 또한 중국 지식인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들은 자기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거의 전부가 타락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독자의 논리를 완전히 다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사물의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지식인은 중국 사회의 민주화와 자유와 인권을 위해 분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중국의 지식인은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 외적 원인을 이용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오늘날 세계는 무기 장비의 발달로 ‘아래로부터의 무장혁명’이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예전처럼 한 나라의 피지배계급이 칼이나 창 등 단순한 무장으로 부패 타락한 정부를 전복시키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운 외부의 압력을 중국의 지식인이 이용하는 것은 하나의 전략일 수 있다.
나아가 ‘전지구화’를 논하는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독재정치보다 민주정치의 비중을 높이는 일은 인류문명의 환경을 개선하는 작업이다. 조금 시야를 좁히더라도 아시아인은 마땅히 아시아의 정치 환경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책임져야 한다. 유럽인이 유럽공동체를 건설한 역사를 보라. 유럽공동체의 국가들은 한때 오스트리아에 극우 정권이 들어서려 했을 때 이에 대해 압력을 행사했다. 이를 과연 ‘내정 간섭’이라고 여겨야 할 것인가. 아니다. 이는 유럽인의 자각 정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아시아인은 과연 이런 수준의 아시아 의식이 있는가.
나는 중국에 대한 관심을 구걸하려는 게 아니다. 아시아의 정치 환경을 더욱 민주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혁하는 일이 아시아인 모두의 사명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나 또한 중국 인민으로서 한국과 일본 인민의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시아인은 이런 개방된 의식 없이는 ‘아시아의 봄’을 영원히 맞을 수 없을 것이다.
자오 궈뱌오 베이징대 교수·언론학
jiaoguobiao2@si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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