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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변혜정

등록 2006-08-07 18:59수정 2006-08-07 19:13

변혜정 이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변혜정 이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야!한국사회
자기만이 아는 어떤 비밀을 오래 간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영원한 비밀은 없다. 최근 영화 <비열한 거리>(감독 유하)에서 병두(조인성)는 영화감독인 친구 민호(남궁민)에게 “너는, 내 편 맞지”라는 짤막한 질문으로 자신의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죽을 것 같은 괴로움에 견디다 못해 털어놓은 그 비밀이 믿었던 친구에 의해 세간에 알려지면서(영화화하면서) 영화는 ‘비열해진다’. 결국 남성세계의 정글의 법칙을 어기고 고통을 이야기 한 병두는 그 세계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학문, 법, 정치 등의 ‘말들의 공간’이 남성의 전유물이라 할지라도, 이상하게 고통의 비밀을 털어내는 자들은 ‘말 많은/입이 가벼운 여자들’이거나 ‘실패한 약한 남자’로 그려진다(조인성의 주연발탁은 다른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그의 ‘눈물 짜는’ 여성성의 재현과도 관련 있다).

견딜 수 없어 뱉어내는 말들은 병두와 민호 같은 친구관계, 경문왕과 두건장이 같은 상하관계, 그리고 현실의 남녀관계처럼 다양한 ‘권력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고통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대체로 남자이거나 권력자들이며, 말을 하는 자들은 병두와 같이 이 사회의 ‘바닥’이거나 약한 자, 특히 여자들이었다. 말을 한다는 것이 ‘성공’과는 거리가 멀고 병두처럼 파멸할 수 있기에 약자들은 고통스럽지만 말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제까지도 많은 진실이 잘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약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됨에도 ‘땅 속에 구멍을 파고’ 말하던지, ‘믿고 있는 친구’에게 털어놓고 싶어 한다. 친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라도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권력 없음’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말하기가 권력관계를 바꾸기도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님이 자신의 귀에 대한 소문에 화를 내기도 하였지만 그 말의 근원을 찾아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백성들이 입에서 입으로 그 말들을 옮겼으며, 또 대나무 숲이 에코를 해댔기 때문에 임금님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통을 말한다는 것, 그리고 듣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고통의 추를 이동시킬 수 있다. 누가 어떻게 듣고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고통을 만들어냈던 권력의 힘이 약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물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어 오히려 그 말하기를 비웃을 수 있는 비열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병두처럼 죽을까봐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남자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말하기’는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자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자 저항으로, 고통의 자기 치유 과정이다. 그래서 억울하지만 여태껏 말할 수 없었던 수 많은 여성들의 말의 잔치는 여성/약자에게 가해졌던 권력을 응징하는 감동의 장이다.

오는 12일 서울 성균관대 운동장에서 성폭력 경험자들의 말하기 대회가 네 번째 열린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인식되었던 ‘남성’들의 과잉된 성적욕망들을 응징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광장에 울려퍼질 것이다. 꽃뱀(?)처럼 당할 만하니 당했다는 비난과 주변의 손가락질을 뒤로 하고 그녀들은 자신의 고통을 말할 것이다. 신라시대의 두건장이처럼 몰래 숨거나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병두처럼 술에 취해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듣는 자들이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고통의 말하기’는 자기 치유를 넘어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될 것이다.

변혜정/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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