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논설위원
1996년 12월 말 신한국당이 국회에서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하자,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을 단행했다. 결성된 지 1년밖에 안된 민주노총은 해방 이후 사실상 최초의 총파업을 이끌어내어 정권을 궁지에 몰았다. 정권은 결국 97년 2월 노동법을 다시 개정하겠다며 물러났다. 하지만 3월 국회에서 처리된 개정안은 정리해고 시행을 2년 미루고 상급단체 복수노조 금지를 없애는 선에 그쳤고, 변형 근로제 등 대부분의 조항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지금 다시 노동법 개정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노동계의 강한 반발 속에 비정규직 법안을 마련해 국회로 넘긴 데 이어 ‘노사 관계 선진화’를 내세운 노동법 개정안을 얼마 전 확정했다. 이번 법 개정 작업은 많은 면에서 96년 진행됐던 것과 비슷하다. 당시도 노사관계 개혁위원회가 구성되어 정부와 경영계,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계가 법 개정을 논의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는 합의 도출에 실패하자 정부가 일방적으로 법 개정을 시도한 반면 이번엔 마지막 합의 과정에서 민주노총만 따돌림 당한 점이다.
이번에 주로 부각된 쟁점은 복수노조 허용 문제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여부였지만, 이에 못지 않게 노동자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것이 해고 관련 규정과 직권중재 대체안이다. 부당한 해고에 대한 형사처벌이 없어지고 부당 해고 판정에 따른 구제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조항이 새로 생겼다. 또 노동자가 원하면 복직 대신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 합당한 이유없이 해고해도 문제가 되지 않고, 한참 만에 복직 판정을 받더라도 회사는 복직 대신 보상금으로 해결할 길이 열리는 것이다.
직권중재 대체안은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은 공익 사업장의 파업에 대해 노동위원회가 직권중재를 결정하면 파업을 중단해야 한다. 개정안은 직권중재를 폐지하는 대신 필수 공익 사업장을 항공, 혈액, 폐수처리, 증기·온수 공급업까지 확대하고, 이런 사업장에 대해서는 파업 대체 인력 투입을 허용한다. 게다가 최소 업무에 필요한 인원은 파업에 참여할 수 없다. 파업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 파업을 해도 대체 인력 투입으로 회사가 별 타격없이 돌아간다면 파업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파업 참여율도 떨어질 게 뻔하다.
그런데 이런 개정안이 확정되는 동안 민주노총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한국노총이 정부의 법 처리 강행 방침에 반발해 국제노동기구 아시아·태평양 총회에서 철수할 때나 경영계와 물밑에서 협상을 벌일 때 그리고 정부가 최종 방침을 저울질하고 있을 때, 민주노총은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정부가 법안을 마무리하고 있는 와중에 민주노총 위원장은 미국 노총과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려고 출국했다. 지난 11일 노·사·정이 최종안을 발표하던 순간, 민주노총 위원장은 미국 노총에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과 노동법 개정안 반대에 대한 지지 요청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아무리 애를 써도 법안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위원장이 핵심 노동 현안이 처리되는 와중에 자리를 비우는 건 곤란하다. 노동법이 전체 노동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96년과 달리 민주노총은 합법 기구이고 국회에는 노동자들을 대변할 민주노동당 의원들도 있다. 파업밖에 방법이 없던 당시와는 다르다. 하지만 노동법 개악을 막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모두 소용없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의지가 없다면, 민주노총의 주인인 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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