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지금 팔짱 낀 자세는 아름답다

등록 2006-09-17 21:00

김갑수
김갑수

대학 동기 중에 유난히 말 많은 친구가 있다. 오토바이가 달린 그의 입이 걸쭉한 사투리 억양과 더불어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 좌중은 으레 포기 어린 침묵모드로 전환된다.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모임에서 그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말 많은 인간이 제일 싫어!” 주위에 일순, 멈칫하는 긴장이 흘렀다. 곧이어 잘 못 참는 친구가 되받았다. “너 말 많잖아?” 이어지는 좌중의 박장대소…. 하지만 정색을 하는 오토바이의 항변으로 보건대 그는 진심으로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단 자기 자신만은 빼고.

어떤 심리학자에게 들은 말인데,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두 가지 자의식이 있다고 한다. 첫째, 모든 인간은 자기가 잘생겼다고 믿는다는 것. 둘째, 자기는 정의롭다고 믿는다는 것. 그럴 법한 말이다. 심지어 심하게 생긴 것 투정을 일삼는 사람도 알고 보면 은근히 자기 외모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하물며 모든 것이 조상 탓, 세상 탓인데 어찌 자기만은 정의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전에 만난 박재동 화백이 택시를 탔는데 오십대 기사 아저씨가 ‘민주화의 민자만 들어도 울화통이 치민다’ 하더라며 탄식을 한다. 운동권, 민주투사, 재야인사, 진보인사, 좌파, 이것이 요즘엔 세상에 둘도 없는 욕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다 가자던 뜨거운 맹세’가 잠시 훈장이 되는 듯하다가 처참한 몰골로 시정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있는 형국이다. 사회세력 간의 권력게임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박하는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택시기사 아저씨의 울화통은 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문제는 그 울화통이 그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칠게 보자면 길바닥 인심의 대부분이 현재 울화통 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 친구 오토바이나 심리학자의 진단이나 공통되는 지점이 자기 객관화의 문제다. 자기가 옳고 정당해야 한다는 욕망의 반작용으로 한때 더 옳고 더 정당하며 더 근사하다고 믿었던 대상에 대한 격렬한 반감과 성토가 발생한다. 내 기억에 1980년대에는 국민 대다수가 운동권이었다. 시위하는 대학생에게 누구라도 물을 떠주고 약국이나 가게들은 도망치는 학생들을 숨겨주었다. 그때의 ‘우리’가 ‘너희’ 혹은 ‘그들’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객관화 상실의 징표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요즘의 대중적 보수심리의 실체가 아닐까 한다.

두 가지가 우려된다. 우선 보수화가 아니라 극우화의 조짐이다. 이것은 ‘나 하나 등 따시면 되지’ 하는 이기주의보다 훨씬 위험한 흉기의 확산이다. 극우세력의 열정과 자기 헌신이 거의 광신의 종교적 태도로 비화하곤 하는 것을 역사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현재 우리 사회는 우경 극단주의를 제어할 아무런 수단이 없다.

또 하나, 쏠림현상에 따른 균형감각의 상실이다. 이른바 양심세력이라고 불리던 자들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니 무 하나 제대로 못 썰더라 하는 실망감에는 공감할 수 있는데, 흡사 그들이 만악의 근원인 양 저주를 퍼붓는 세태는 실로 어이없는 것이다. 분노의 표적을 만들어 자기 위안을 삼는 것이 소시민 의식의 한 특성이지만, 지금의 표적물이 한때 마음속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간과된다.

지금 분노의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언한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숨고르기를 하자고. 서둘러 입장부터 정하지 말고 좀 큰 흐름을 관망하자고. 지금 팔짱 낀 자세는 아름답다.


김갑수/문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