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06 19:38
수정 : 2005.03.06 19:38
몇 해 전 한 탤런트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공개함으로써 ‘커밍아웃’이라는 말이 한때 크게 유행한 일이 있다. 이번에 친일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승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충격적인 글은 전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다시 한번 커밍아웃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그 탤런트는 커밍아웃의 여파로 한동안 텔레비전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에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해 왔던 동성애자 문제가 공론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발표된 한 교수의 대담무쌍한 글은 사람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체성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진보에 일정하게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보와 변화의 계기는 부정적인 사건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일제의 지배가 한국민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그의 논리와 같은 맥락이다. 일제 식민지 기간이 조선의 왕조시절과 비교하여 사회적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떠한 발전인가 하는 점이다. 한 교수는 ‘천만다행으로’ 일본식 발전의 길을 걷게 된 것을 우리 민족의 축복으로 본다는 것인데, 이 고백이야말로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친일파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소아병적인 좌파 콤플렉스를 포함하여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일본 극우파의 기본 인식은 한 마디로 “일본은 거의 야만 상태에 있던 아시아를 서양과 대등하게 만들어 준 은인”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오랫동안 직접 통치를 했던 한국과 대만은 일본의 은혜를 특별히 많이 입은 행운아라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부러워하는 한국과 대만의 경제적 성공이 그 증거다. 그런데 ‘철없는’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극적으로 정권을 잡은 노무현 정권이 지난 반세기 동안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했던 친일파 문제를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손보겠다고 하니까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보수우익 단체의 대표가 드디어 커밍아웃을 단행하고만 것이다.
사실 이 초조함에는 자신들의 부귀영화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보다 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부정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은 독립군의 애국심과 버금가는 비장함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우리가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은 그들이 그토록 걱정하는 ‘우리나라’란 친일파의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 땅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뿌리는 대부분 일제 때부터 친일의 길을 걷던 사람이거나 그 후손이다. 그들에게 친일은 선진국 일본의 이웃에 자리한 한겨레의 운명이며 세계 정세의 필연적 흐름이다. 일본이 미국에 패한 것은 불행이었지만 그들이 한국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친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또 다른 축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일파의 줄기를 만인 앞에 드러내어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집권당의 시도는, 정권욕에 사로잡혀 역사를 호도하려는 망국적인 행태나 다름없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국민정서를 거스르면서까지 흉중의 말들을 토해내고 있다.
양비론같이 들리겠지만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친일파들은 이제 대한민국을 우리 국민 모두의 대한민국으로 놓아주시길 바란다. ‘우리만의 대한민국’은 사실 동서 냉전의 종식과 함께 끝나야 했다. 그리고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선진한국’ 건설과 ‘친일 진상규명’을 동시에 이루려는 집권여당은 일본의 길을 따라 ‘선진조국’ 건설에 앞장서 온 친일파들과 과연 무엇이 다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말로는 극일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친일파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면 정치적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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