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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나눔/1986.9.26 / 곽병찬

등록 2006-09-26 18:36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유레카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자신의 몸과 생명을 나눴다. 이를 되새기는 의례가 성체성사(성찬식)다. ‘성체’의 라틴어인 에우카리스티아는 감사한다는 뜻. 당신의 몸과 생명을 주신 예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말로만 감사할 수는 없다. 이 성사를 통해 기독교인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세상에 자신의 몸과 생명을 나누겠다고 다짐한다. 밀떡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누어 먹는 것은 그 상징이다.

이런 정신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는 빈곤이나 소외 등 ‘사회적 배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인식한다. 예수의 생명을 받은 이들에게 나눔은 선행이 아니라 의무인 것이다. 사회적 배제는 이런 의무를 행하지 않아 초래됐다! 빈곤을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는 진보적인 학계의 인식과 비교하더라도 매우 급진적이다. 십일조는 상징적 실천일 뿐이다.

다른 종교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소득의 10%를 헌금하도록 하지만, 이슬람에선 재산의 2.5% 헌금(자카트)을 의무화하고 있다. 불교에선 무소유, 자비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나눔을 종교적 실천의 으뜸으로 삼는 점에서 세 종교는 같다.

이렇게 종교적 개념으로서 나눔은 2000년이 넘었다. 그러나 이것이 일상적 실천의 개념으로 우리 사회에 정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86년 9월26일, 몇몇 성공회 사제 지망생들은 서울의 달동네 상계동에 탁아방과 야학을 개설하고 나눔의 집이라 불렀다. 무심코 붙인 이 이름은 나눔을 종교의 울에서 세상으로 나오게 한 계기가 됐다. 성공회 전체로, 각 종교와 사회단체로, 165개 업종의 수많은 상호로, 그리고 ‘나눔의 날’로 번졌다. 불과 20년 만에 우리 시대의 열쇳말이 됐다. 달동네 한 구석에 켜진 촛불 하나가 온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 된 것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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