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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8 19:16 수정 : 2005.03.08 19:16

손등에 벌레가 기어간다. 손목을 잘라야하나? 하필, <한겨레>에 개인정보에 대한 기획기사가 난 바로 그 날이었다. 기획기사의 첫 주제는 생체정보. 다들 아는 것처럼 그 정보란 개인 특유의 홍채와 지문, 족문, 손등의 정맥 등을 이름이다. 이쯤되면 기사의 내용은 뻔했다. 저 무서운 권력이 노리는 개인 통제의 욕망. 그리고 이어지는 인권침해.

우리에게 선거권이나 참정권, 그 외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셀 수 없는 권리들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사실 그 자연스러움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육을 통해 각자에게 깨우쳐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권후진국에서 인권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이도 많지만 대다수가 그 인권의 후진성에 적응하며 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권리에 대한 당위성이 우리에게 깨우쳐질 시기의 대한민국은 사회적으로 그리 성숙치 못했다. 그래서 ‘무언가’가 덜 깨우쳐졌다. 수백만원 정도로 막대한 손해를 보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저 눈 깔고 입 닥치고 있는 것이 ‘착한사람’이다. 제가 사서 제가 피우고는 담배회사에 소송 걸지를 않나, 제가 사서 제가 먹고는 햄버거회사에 소송 걸지를 않나 등 벼라별 것을 다 가지고 소송을 거는 외국의 예가 매우 생경한 것은 그들이 우리처럼 속으로 삭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덜 주입되어서 참다운 권리를 누리고 있는지 의심이 갈 때가 많다.

기사가 나온 날 기숙사의 한 조교가 말했다. “출입이 손등인식기로 통제되기 때문에 손등을 등록해야 해요.” 그러자 수십명이 우르르 몰려나가 단조로운 전자음을 들으며 손등 인식기에 딸깍딸깍 손등을 등록했다. 주민증 발급받던 날 열 손가락에 떡칠되던 끈적한 인주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 아니 대한민국의 구리찝찔한 내면을 알지 못하던 시절 그 인주의 기분 나쁨은 결코 “지문 날인은 반인권적”이라 교육받은 결과가 아닌 본능적인 무엇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수년이 흘러 이것은 간편하다. 딸깍 한 번이면 된다. 인주를 떡칠하고는 지린내 풍기는 동사무소 화장실 안에서 무슨 죄를 지은 거마냥 뽀다닥거릴 때까지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던 그런 불편함이 아니다. 방에 들어와 고요히 앉아있자니 손등에 벌레가 기어간다. 손등에 벌레가 기어간다. 핏줄이 도드라지고 그 끈적한 인줏빛으로 손등이 물들고 있다. 붉게 물들고 있다. 내 혈관으로 무서운 권력이 흐른다. 끈적한 권력이 흐른다. 뭔가 아찔한 것이 잠들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내게 미안하다. 그 조교에게 이거 꼭 해야해요? 한 마디도 나는 꺼내지 못 했다.

목승원 moxe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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