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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독자발언대] ‘코시안’이라 말하지 말자

등록 2006-10-20 18:23수정 2006-10-20 18:31

독자발언대
코리안과 아시안을 합친 신조어인 ‘코시안’은 이제는 대다수 사람들이 아는 말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아내 사이, 또는 한국인 남편과 외국인 아내 사이의 자녀들을 코시안란 이름으로 구별짓기를 하고 있다.

외국인 신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들이 결혼해서 잘 정착해 사는 모습보다는 입국 과정의 합법성, 신부를 산다는 인식 등 부정적인 측면에 주목해 왔다. 그리고 그들이 아이를 낳기 시작하자 민족 정체성이니 단일민족이니 운운하면서 괜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정작 신부를 외국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농촌 총각들과 신부들의 처지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인종주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는 우리에게도 존재한다. 단지 좀더 늦게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을 코시안이라 구별해 버리면 그들은 ‘우리’가 될 수 없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독일처럼 국가정책적 차원도 아니고, 미국처럼 이민국가를 지향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불러들인 것이다. 우리는 민족주의 전통이 매우 강하다. 이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우리를 통합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었지만, 반대로 우리가 아닌 대상에는 매우 배타적인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작년 한해 우리나라의 전체 결혼 34만건 가운데 약 8%가 국제결혼이다. 이 중에서 한국 여성이 외국인 남성과 결혼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들어오는 외국인 신부들과 한국 남성의 결혼이다. 더군다나 인구가 적고 국제결혼 비율이 높은 농촌에서는 이런 모습이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세계화’란 말을 질릴 정도로 접하면서 산다. 꼭 선진국하고만 교류해야 세계화인가? 농촌 지역에 외국인들이 많이 유입되면 이것도 하나의 세계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이는 인정하되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코시안이란 단어 자체가 우리의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니얼 헤니와 데니스 오에 우리는 열광하지 않았는가? 우선 언론에서부터 코시안이란 낱말을 되도록 쓰지 않았으면 한다.

윤현위/건국대 지리학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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