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10 19:28
수정 : 2005.03.10 19:28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논의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역사의 정치화이다. 역사 논쟁이 권력투쟁의 용어로써 이루어지곤 한다. 한국 현대사 인식은 현실인식과 직결된 것이어서 전공자가 아니라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런가, 현대사의 새로운 해석을 주창하는 이들 가운데는 역사학자보다 사회과학자나 언론인, 문인 등 비전문가들이 더 많은 것도 눈에 띈다.
그 중 일부는 제국주의 강점, 분단, 독재로 이어지는 역사과정 속의 한국사회 지배구조와 권력관계를 비판하는 역사해석을 ‘자학사관’이라 일컬으면서 ‘자유주의 사관’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일본 우익-극우 논객들이 일본 제국주의 비판론을 자학사관이라 칭하고 자신들의 우익사관을 자유주의 사관이라 일컫는 것을 답습한 것이다. 나라와 나라 간의 상호이해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에, 어째서 다른 사회를 경멸하고 자국 중심주의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사람들의 용어를 가져와 자기 사회를 가르치려 드는지 딱하다. 새로운 해석자들은 한국 역사는 성공의 역사라고 강조하는데, 문화적 독자성을 가진 주권 공동체의 성원으로 자존심을 가지는 것과 성찰 없는 자기만족에 빠지면서 식민지 지배와 독재까지 옹호하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이들이 그 ‘성공’의 동인을 민주화를 위한 사회구성원들의 주체적 노력이 아니라 식민지 토양에 뿌리를 둔 독재에서 찾는 것도 흥미롭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극단적 방식으로 옹호하는 한 정치학자의 글이 일본의 잡지에 실린 것 때문에 물의가 일었다. 근대의 핵심은 자기결정권을 가진 주체의 형성인데, 이를 박탈당한 채 제국주의 지배의 객체가 된 사회에 대해 어찌 근대화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지?
반면 다른 일부 논자들은 국가주의를 비판하다 못해 한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국가를 지배의 단위로만 생각하고 국가를 이룬 사회가 의사소통 및 민주적 의사결정의 단위로 재편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공통된 언어를 매개로 하는 의사소통 공동체는 개개인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소비와 욕망만의 주체로 해체되는 것을 막아주는 연대의 틀이다. 한국어 사용자들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공동체는 무수한 결함을 내포하나마 구성원들의 직접적 의사소통 공동체라는 성격을 가진다. 이는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든가 한글 창제가 유일무비한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언어적 의사소통의 가능성이란 ‘지금 이 곳’ 사람들의 일상적, 주체적 삶의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족’론을 오독하여, “형성”된 것은 곧 “허위”라는 판단에 바탕을 두고, 이러한 연대의 틀마저 국가주의의 소산으로 폄훼하려 하는 논자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신자유주의적 입장의 국민국가 비판론은 때로는 극우적 국가주의와 만나, 우리도 100년 전에 일본의 길을 갔어야 한다는 식의 발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생 근대국가 일본이 제국주의-전범국가로 나아갔던 길까지 본받았어야 된다는 말인지?
이래저래 현재의 역사 논의는 사회구성원들 간의 민주적 관계가 확대되는 과정을 찾기보다 국가들 사이의 혹은 국가권력과 구성원들 간의 지배-피지배 관계만을 논하고, 사회적, 인간적 관계를 통계수치로 바꿔치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통계수치는 참고자료가 될지언정 시대와 사회를 평가하는 최종 심급이 될 수 없다. 인간이 담긴 역사가 필요하다.
일본 잡지 기고로 충격을 준 정치학자도 인간을 고려하지 않기에 극단적 무감각에 빠져버렸다. 독재 권력 주변에서 온갖 호강을 누린 주제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기 위해 전쟁에서 여성을 성노예화하는 것까지도 당연시했으니 말이다. 억압하고 군림하는 것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가 얼마나 더 기쁜 것인지를 모르는 한 가련한 영혼에 대해 우리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정숙/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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