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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그 장소에는 기억이 없다 / 이명원

등록 2006-11-23 17:34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야!한국사회
동일한 공간이라 할지라도, 공간에 대한 개인적 인식의 편차에 따라 그것은 다르게 파악된다. 가령 나는 서울의 연희동에 살고 있는데,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씨와 연희동을 연계시킨다. 하긴 전두환씨말고도 이 동네에는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도 살고 있는데, 광주에서의 그 끔찍스런 민중학살을 잊지 못하는 나는 연희동에 대한 사람들의 그런 표상 체계가 영 마뜩지가 않다.

공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로만 인가르덴이라는 서양의 철학자는 실존적 장소의식이라 명명한 바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내게 연희동은 전두환씨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치열한 생활의 공간이자 세상공부의 현장이다. 이 생활과 세상공부에 지쳐간다고 느껴질 때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안산을 오르내린다. 그곳에는 또한 연희 104고지라는 팻말이 있기도 한데, 이곳이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였다는 비석의 설명문을 읽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또한 누군가 피 흘리며 죽어간 곳이라는 장소의식이 가슴을 치는 것이다.

한국의 기형적인 도시화는 과거의 흔적들을 워낙 매끈하게 지워나가는 것이어서, 실존적 장소의식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드는 듯하다. 언어 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역사성을 옛 건축물과 새 건축물이 공존하고 있는 도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바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는 비트겐슈타인 식의 도시 비유는 통용되기 힘들 것 같다. 부정하고 싶지만 한국의 도시화는 기억이나 역사로서의 실존적 장소의식과는 무관한 ‘부동산’으로 전락하고 있는 듯하다.

스모그의 지배 아래 있는 서울을 산책한다는 게 때로 내키지 않지만, 과거의 흔적이 미끈하게 지워진 서울을 거닐면서, 지나간 역사의 기억을 끈질기게 더듬는 것이 자못 훌륭한 교육의 일부라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청계천을 거닐면서 전태일이 고통스럽게 살아내고 또 죽었던 근대화의 어둠에 대해 생각하거나, 박태원의 <천변풍경>에 묘파된 천변의 민중들에 대해 상상한다. 서울역과 한국은행,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이 있는 도심을 거닐면서, 경성의 도시화와 식민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인식했고 또 절망한 모더니스트 이상의 비애에 대해 유추해 보곤 한다.

남대문시장의 인파를 거슬러 남산에 오르면서, 일본의 소설가 다나카 히데미쓰의 <취한 배>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일본인의 눈으로 1940년대 경성의 풍속을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 속에 묘사된 남산은 식민통치의 이데올로기적 상징인 조선신궁과, 화려한 일본식 별장과 또 일본인을 상대로 했던 대규모의 공창이 있었음이 서술되어 있다. 이 소설 속의 화자는 절망과 퇴폐의 몸짓으로 남산을 오르지만, 민주화 시기의 남산은 많은 민주화 인사들에게 신념의 배반을 요구했던 고문의 상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 자리에서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화려한 문명의 첨탑으로 서 있는 서울타워의 화려한 외관일 뿐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공간은 더 이상 실존적 장소의식을 환기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집과 도시, 그리고 공간은 악무한적 투기와 인간적인 교류가 차단되어가는 소외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제 질서가 강제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 불가피성을 뛰어넘어 집과 도시와 공간이 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의 근원성에 대해서 왜 교양시민일수록 오히려 청맹과니가 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집에 대한 의식의 부재라고 할까.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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