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객원논설위원칼럼
교원평가제와 차등 성과급 제도 문제를 다루는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상대역으로 출연해 맞은편에 앉은 정부 관료가 말한다. “전교조가 정부중앙청사 앞 길거리에서 거의 한달째 집회를 했지만 언론이 보도하는 거 보셨습니까? 지금 언론이 전교조의 투쟁에 대해 거의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관료의 얼굴에 언뜻 ‘회심의 미소’가 서려 보였다. 전교조 교사들이 길거리에 나와 아무리 투쟁을 해도 그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설정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거의 고소해하는 표정처럼 와닿았다. ‘정권은 짧고 관료는 영원하다’는 자신감으로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 관료가 ‘교사 노동자’들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다.
1929년에 세계를 휩쓴 대공황은 자본주의 사회에 커다란 교훈을 깨우쳐 주었다. 자본의 노동 착취가 무제한 허용됨으로써 노동자들이 구매력을 일정 수준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경제체제 전체가 몰락할 수도 있다는 반성이 ‘야만적 자본주의’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노동3권’이 법률에 체계화된 것이나 케인스주의에 바탕한 미국식 노자간 타협적 질서는 그 성과물 중 일부다. 특별히 진보적인 시각이 아니라 시장경제주의 시각으로 봐도 그렇다는 얘기다.
일제 식민지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시작된 자본주의 대한민국은 그러한 최소한의 교훈조차 깨달을 기회가 없이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 분단, 친일독재, 군사독재로 이어진 자본주의 역사가 다른 나라에 또 있는지 보라. 그 비정상적인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에서 노동자 권리를 이해하는 수준은 유럽 사회민주주의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고 ‘천박한 자본주의’라는 미국보다도 훨씬 낮다. 아직도 대학생들이나 대기업 신입사원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강연이 끝난 뒤 “‘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묻고 “회사마다 노동조합이 생겨 버리면 도대체 국가경제를 어떻게 운영하느냐?”고 따져 묻기도 한다.
한 대기업에서는 회사 프로 운동선수단의 기념품을 사원들에게 나눠주면서 노동조합원들에게는 주지 않아 조합원 자녀들이 같은 사택에 사는 비조합원 자녀들과 뼈저린 차별을 느끼게 만들었고(그 방법을 생각해 낸 인사노무 관리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항목은 거의 없이 상사에 대한 복종도를 평가하는 기준들로 가득 채워진 ‘신인사제도’를 도입했다.(이러한 제도는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시각으로 봐도 회사가 망하는 지름길이다.)
이렇게나마 세상에 알려진 일들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회사에서 오늘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행태 중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일들을 자행하는 인사노무 관리자들은 전혀 죄책감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공공의 적’ 노동조합에 맞서면서 국가경제를 살리고 기업경쟁력을 높이는 정의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오늘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나라 중에서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우리처럼 민법의 원리로 판단해 포괄적으로 적용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오래전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야만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권리에 관한 한 ‘신자유주의’도 아닌 ‘구자유주의’ 시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언론이나 국민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동조합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는 유치한 이야기를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할까?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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