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명/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객원논설위원칼럼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대안찾기 논의가 사회세력들 사이에 더욱 무성해지고 있다. ‘동반성장’, ‘선진화’, ‘사회투자 국가’ 같은 담론 차원의 새로운 용어가 무대에 등장했고, 구체적인 정책을 담보한 경제·사회정책 패러다임 모색도 봇물을 이룬다. 대안사회에 대한 각축전에서 박정희 체제라는 ‘확실한’ 모델을 갖고 있는 보수진영에 견줘 진보진영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노동운동은 이에 필적할 만한 구체적 내용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에는 세계화,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등의 요인이 난마처럼 얽혀 집단간의 이해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구조화돼 있고, 효율과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실질적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회집단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진 현실에서 노동운동은 사회성원 사이 연대와 호혜성이라는 진보적 가치를 구호 차원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 제도 차원에서 풀어가기가 쉽지 않다.
최근 민주노동당에서 제안하여 노동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 중인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은 사회연대적인 사회체제의 내용을 현실 사회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작지만 매우 소중한 희망으로 보인다. 이 사업은 국민연금이라는 ‘진보적’ 제도의 혜택에서 소외된 약 일천만명의 비정규직, 영세자영자, 빈곤층의 연금보험료를 정규직 근로자가 한시적으로 납부해줌으로써 취약계층에게도 연금을 받을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물론 이 제안의 핵심은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론’도 아니며 ‘혜택받은’ 노동자가 ‘박탈당한’ 노동자에게 박애주의를 실천하자는 것도 아니다. 정규직 노동자의 선도적 노력을 통해 국가와 자본의 양보를 얻어내고 이를 통해 노동진영의 정치적 신뢰를 강화하고, 나아가 사회연대적인 체제 내용을 구체적으로 채우자는 것이다. 이 제안이 동력을 얻어 실행에 옮겨진다면 사회정책 수립의 새 모델로 노동진영의 새로운 역사적 성과로 기록될 가치가 충분하다.
난마처럼 얽힌 비정규직 해법에 대한 우리은행의 사례도 구조적 문제를 노동계가 주체적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기존의 정규직과 구별되는 직군을 만들고, 이 직군으로 비정규직을 편입시켜 임금과 승진 등에서 차별을 온존시키는 우리은행식의 비정규직 해법이 노동자 내부의 새로운 차별을 구조화할 위험성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해 동안 비정규직의 해법에서 사회 구성원 사이 연대와 호혜 정신을 이 정도나마 구체화하고 사회적 주목을 받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은행 사례 이후 비정규직 해법에서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긍정적 논의들이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치 중립적인 정책은 없다. 어떤 정책이든 그것이 이론 차원을 넘어 현실에 적용되면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또한 정책은 이를 제안한 정치세력의 신뢰성과 헤게모니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노동운동이 국가의 정책을 진보적 방향으로 이끄는 방식은 다양하다. 진보적 담론의 형성과 확산, 입법 요구 운동이라는 전통적 방식 못지않게 노동 현장의 고민을 바탕으로 나온 의미 있고 실현 가능한 사회연대적 정책의 맹아를 확산시키는 작업은 신뢰 위기를 겪고 있는 노동운동 세력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20년이 흘렀다. 노동운동은 변화된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사회적 연대와 호혜라는 노동운동의 근본적 가치를 어떻게 현실 사회에서 구체화할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때다.
김연명/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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