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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미 FTA 협상문건 유출의 전말

등록 2007-01-24 02:49수정 2007-01-24 09:53

보도 내용에는 관심없이 억측 난무

정부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전략을 담은 비공개 문건이 <한겨레>와 <프레시안>에 보도된 뒤 정부 일각과 보수언론들의 행태를 보면, 한마디로 ‘놀고 자빠졌다’는 말이 딱 어울리지 않나 싶다. 보도 내용에는 눈과 귀를 막은 채 보도 경위를 놓고 온갖 억측을 펴고 있다. 한-미 FTA 협상에 대한 성실한 보도를 자제해오던 일부 언론들은 ‘우리 협상단의 협상력에 큰 타격을 줬다’는 비판에서부터 ‘국가 배신행위로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도대체 그들의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지, 어떻게 그 입으로 언론자유를 버젓이 내뱉어왔는지 묻고 싶다.

한-중 마늘 협상의 방정식

이번 파문을 보면, 지난 2002년 여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마늘 협상 파동’이 떠오른다. 그해 상반기에 중국산 값싼 마늘의 범람으로 마늘값이 폭락하자 농민들이 농협을 통해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 조처의 연장을 요청했다. 마늘 농가에선 정부가 마늘 시장 개방에 따른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세이프가드쯤은 남겨뒀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터였다. 무역피해를 조사하고 구제결정을 내리는 기관인 산업자원부 무역위원회도 즉각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동이 걸린다. 2000년 7월에 타결된 한-중 마늘협상 합의문의 부속문서에 ‘세이프가드 연장을 2년 반으로 제한’한다는 조항이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조항은 그 때까지 ‘국가기밀’이었다.

이 기밀이 새나가자 전국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농민들은 마늘 협상 결과도 문제지만 핵심 내용인 세이프가드 관련 조항을 정부가 숨긴 것에 더 분노했다. 처음부터 세이프가드에 시한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마늘 농사라도 줄였을 게 아닌가. 성난 농심에 놀란 정부 부처의 대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주무부처인 농림부는 “(마늘협상 당시) 문제의 조항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하고, 청와대는 “대통령은 그런 합의사실을 보고받은 적이 없다”며 아래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등 ‘네탓 공방’만 벌였다. 협상 실무창구였던 외교부가 뒤늦게 비밀을 털어놨다.

대외 협상이 국가기밀이 된 이유


“마늘 협상 합의문을 만들 당시에는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에 대한 중국의 보복 조처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탓에 부속서 내용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마늘 교역 관련 협상을 한다면서, 중국의 어거지 통상보복 위협을 무마하는 것과 마늘시장 수입안전장치를 몰래 ‘빅딜’ 했다는 것이다. 결국 50만 마늘농가는 적당히 꼼수를 부려 무마시키고 중국과 마늘 협상을 성공적으로 타결한 셈이다. 당시 협상 실무책임자였던 외교부 관리는 훈장받고 지금 A급 외교공관에서 대사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뒤늦게 밀실협상의 내용이 드러나자 여야 정치권과 언론들의 질타가 연일 쏟아졌다. 책임자 처벌과 함께 통상외교 시스템의 개혁을 촉구했다. 차관급 고위공직자 3명이 옷을 벗었다. 대통령직속 한미자유무역협정체결위원회의 한덕수 위원장도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경질됐다. 마늘 협상 때 통상교섭본부장으로 몰래 빅딜을 지휘했던 책임을 진 것이다. 당시 그는 책임추궁 여론 맞서 “마늘 농가 보호를 위해 30배 이상 보복을 받는 정책은 국익에 맞지 않다는 관련 부처간에 컨센서스가 있었다”고 강변해, ‘농심을 짓밟는 소신’이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어쨌든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 민간 로펌에서 억대 연봉을 받고 있다가 참여정부 출범 뒤 국무조정실장과 경제부총리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정부 입맛대로 만든 대외비, 언론도 따라야 하나?

5년여 전에 벌어졌던 중국과 마늘 협상 파문을 좀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그 때나 지금이나 정부의 비민주적이고 비밀스런 통상외교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이나 사고방식, 행태가 별로 달라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이 5년여 전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면, 국내 마늘시장 정도가 아니라 국가경제 전반과 국민 개개인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협상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언론으로서는 여러 채널을 총동원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사안이다. <한겨레>도 협정문 하나하나가 누구에게 어떤 득실을 줄지 짚어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안팎으로 여전히 부족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부 언론은 “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에 협상 내용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마라톤 중계를 골인지점에서만 하는지, 협상이 타결된 뒤 그 방대한 내용들을 제대로 분석하고 평가할 자신이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지금까지 한-미 FTA 협상과정을 취재해온 경험으로는, 정부가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던 경우는 대부분 ‘대내협상의 차질’을 우려해서였다. 김종훈 수석대표도 지난해 7월 언론재단 주최 포럼에서 “개방으로 손해를 볼 사람들의 반대가 우려돼 협상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태도는 한-미 FTA 협상이 국민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고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미 두 나라의 협상 추진절차를 보면 뚜렷하게 대조적이다. 미국은 대내협상의 결과물로 한국과 대외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사실 미국이 지금까지 협상에서 요구하는 내용들은 별 새로울 게 없다. 크게 보면, 미국 내 한국 시장에 대한 이해당사자들의 건의사항을 죽 모은 것들이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미 의회 조사국, 무역대표부(USTR), 그리고 수많은 미국 업계단체 등에서 나온 한국시장 관련 보고서나 대정부 건의문에서 미국의 협상 요구안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또 요구안의 목적이나 의도 또한 아주 구체적이다. 미국 정부가 보호해야 할 분야는 아예 법으로 보호막을 쳐놓고 ‘협상 의제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이런 분야가 섬유와 연안해운업 등이다.

대국민 꼼수 VS 비장의 협상카드

이와 달리 우리 정부는 미국 요구안을 먼저 들어 국내 의견수렴 절차를 밟고 예상되는 국내 반발이나 피해에 대한 대책 등을 세운다. 공식 협상개시를 국민들에게 알리기도 전에 쇠고기, 자동차, 의약품, 스크린쿼터 등에 대해 미국이 요구한 ‘4대 선결과제’를 들어 준게 단적인 사례이다. 정부 안에 고위층 몇몇 사람들끼리만 그렇게 결정해 놓고 ‘대외비’에 부쳤다. 국민에게 알리지 않는 게 한-미 FTA 추진의 초기전략이었던 셈이다. 이후에도 정부의 ‘대외협상 우선 전략’은 꾸준히 이어진다. 국민들에게는 협정의 구체적인 득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은 채 ‘국익’ 등 추상적인 구호로 ‘FTA는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주입시키고있다.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흑백논리로 줄세우기까지 강요하고 있다.

지난 18~19일치 <한겨레>와 <프레시안>의 기사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이런 비이성적이고 반민주적인 태도의 극치를 보여준다. 기사가 나간 뒤 대통령직속 한미자유무역협정체결지원위원회는 “문건 유출자와 이를 공개한 언론은 분별없는 행동의 결과 협상상대국을 이롭게 한데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협박했다. 보수언론들이 이에 맞장구를 치며 문건 유출자에 대한 마녀사냥에 나서면서 파문이 더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 ‘문건을 누가 훔쳤다’느니 ‘정부의 자작극일 가능성’이라는 등 정말 어처구니 없는 소설들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몇몇 국회의원들이 당하는 피해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광기’마저 느낀다. 이런 광기를 연출하는 이들에게 이쯤에서 제발 거두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한겨레> 기사가 인용한 문제의 문건을 작성했거나 읽어본 당국자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문건에서 미국 쪽에 숨겨야 할 내용이 있나? 기자가 아무리 꼼꼼하게 문건을 읽어봐도 지금까지 미국 협상단과 논의하지 않았던 ‘비장의 협상카드’는 단 한건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4대 선결조건’처럼, ‘묻지마 협상’을 추진하는 쪽으로서는 국민에게 숨겨야 할 내용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기자의 눈에는 진정 국익을 위한 대외협상전략이 아니라 대국민 꼼수가 담긴 문건으로 읽힌다. 이 문건으로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은 무역구제 같은 분야에서 알맹이가 별로 없는 것을 힘겹게 따낸 듯 포장하고, 자동차세제, 건강보험 약값 정책, 농수축산물, 금융서비스 등 국민적 이해가 걸린 쟁점에서는 미국 요구를 술술 들어주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뱀다리:문건은 국회에서 나오지 않았다. 취재원 보호가 기자의 우선적 윤리이지만 괜히 엉뚱한 사람 괴롭히지 말라는 뜻으로 여기서 밝힌다.

박순빈 산업팀장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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