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객원논설위원칼럼
어린 나이에 ‘노동상담’을 시작했다. 20대 후반의 ‘새파랗게 젊은 놈’이 노동법 몇 줄 읽었다고 공단 입구에 상담소를 차리고 앉아, 온갖 풍상을 다 겪고 찾아오는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건방을 떨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직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신기한 듯,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90년대 초, 사상에 대한 믿음이 거의 공황 상태였던 그 어려운 시기에 당신을 지탱한 힘은 무엇이었느냐?”
고백하건데, 나를 지켜준 사람들은 상담소에 찾아오는 노동자들이었다. ‘내가 오늘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하룻밤을 새면, 해고당하거나 몸 다친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그 혹독한 시기에 나를 구원했다.
아버님뻘 되는 노동자가 찾아와 “이제 불구자가 됐으니 자식들 볼 면목이 없소. 산에 올라가 목 맬 나뭇가지 찾다가 내려오는 길이오”라고 울음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 ‘새파랗게 젊은 놈’은 차마 할 말이 없어서, 차라리 ‘내가 나이라도 많이 먹었으면 …’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노동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에게는 정신건강 치료가 반드시 의무적으로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을 해온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노동재해 환자 4명 중 3명이 우울증이나 사회적 부적응증을 앓고 있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그 주장이 거의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노동재해는 경미한 부상이더라도 법률적 다툼이 빈번하고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 등이 동반되면서 분노·우울·불안 등 부정적 감정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정신건강 문제뿐이랴. 최근에 벌어진 ‘석면’ 소동도 마찬가지다. 석면은 한번만 노출돼도 치명적이어서 ‘발암성이 의심되는 물질’이 아니라 ‘확실한 발암물질’이다. 폭발물보다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그러한 석면이 지하철에서 다량 검출된다는 사실이 노동·환경·보건운동 분야 활동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였다. 2001년 4월에도 서울 지하철 역사의 석면 사용과 공기 중 석면 농도가 높다는 사실이 밝혀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노동부와 서울시는 뒤늦게 개선 조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그 조처들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노동단체 등이 사실을 폭로하면 관계당국이 뒤늦게 수습에 나서고, 언론이 잠잠해지면 유야무야되는 일이 되풀이됐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에 비용을 부담시키면서 올바른 목적을 달성하기란 그렇게 어렵다. 지하철이 건설된 뒤 수십년 동안 노동자와 시민들이 꾸준히 석면을 마시며 살아온, 마치 공포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버젓이 우리 현실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220만명, 하루 5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노동재해로 희생된다. 그 어떤 전쟁에 의한 희생자보다 많은 수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2500여명, 하루에 7명이 넘는 노동자가 노동재해로 목숨을 잃는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실제 사망자 수는 1만여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국제노동기구의 추산이다. 선진국에서는 노동재해에 따른 사망을 기업이 태만과 부주의로 노동자를 죽인 ‘기업 살인’으로 규정하여 사업주를 엄격히 처벌하고 있다. 그래야 실제로 국민의 귀한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일터를 만드는 일에 사회 전체가 노력을 기울일 때가 됐다. 비록 그것이 기업에 대한 규제와 비용이 늘어나는 일이라 해도 …. 그것이 올바른 경쟁력이다.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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