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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객원논설위원칼럼] 이주노동자들의 작은 승리, 큰 슬픔 / 하종강

등록 2007-03-05 17:34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객원논설위원칼럼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1980년대 말쯤에 이주노동자들을 처음 만났다. 역사를 몇 걸음 앞서 내다보는 동료가 “앞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나를 끌고 한 성당으로 갔다. 성당 마당에 이주노동자들이 차고 넘쳤다. 책상을 땡볕에 내다놓고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짧은 영어 실력으로 노동상담을 했다.

그 뒤로 그 활동을 열심히 하지 못한 이유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갈등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조국에서는 ‘신인민군(NPA)’이 총을 들고 싸우고 있는데, 돈 벌겠다고 다른 나라에 온 대학 졸업자들이 당시 경직된 초보 활동가 눈에는 ‘도망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사람들 말고도 고통당하는 한국 노동자들이 이 땅에 많다는 생각이 게으름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그 뒤로, 무단 침입한 단속반원들을 피해 도망가던 이주노동자가 건물 고층에서 떨어져 중태에 빠졌을 때도, 공장에 들어온 한국 사람을 단속반원으로 착각한 이주노동자가 심장마비로 숨졌을 때도, 출입국사무소에서 조사를 받던 이주노동자가 공포에 못 이겨 뛰어내려 숨졌을 때도, 단속반원을 피해 산으로 도주한 이주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됐을 때도 남의 일 보듯 했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법원의 판결이 오히려 우리를 앞질렀다. 지난 2월1일 서울고등법원은 “불법체류 외국인도 노동조합 결성, 가입이 허용되는 근로자”라는 내용의 판결을 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인권과 노동권을 요구하며 처절한 투쟁을 벌여온 성과”라며 “숨죽이고 사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며 반겼다.

이 작은 승리에 대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2월11일 새벽,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외국인보호소에 불이 나 9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큰 불이 아니었지만 화재에 대비한 시설이 거의 없었고 굳게 담긴 문이 열리지 않는 바람에 사람들이 철창 안에 갇힌 채 화염 속에서 죽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며 원통해했고 유족들은 참담한 시신 앞에서 “대체 이주노동자들을 사람으로 보기나 했었느냐?”며 울부짖었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은 이주노동자 관련 정책과 함께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둔 우리들이다. 외국인보호소에서 폐쇄회로 티브이나 전기봉 등 반인권적 수단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불법 양태를 개선하겠다며 반인권적 방법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만들어 넣은 사실을 아는가? ‘고용허가제’는 글자 그대로 기업주의 고용을 위한 제도이니 노동하는 사람을 위한 ‘노동허가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이주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회사를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실제 이유는 그렇게 하면 이주노동자 임금이 상승하고 노동환경을 일정 수준 이상 보장해야 하는 등 기업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온 이주노동자가 “힘들 때 어떻게 하냐?”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그냥 참아요”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는가?

미등록 노동자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체제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침해를 방치한 책임으로부터 우리는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도덕률이 수만 년 인류 진화 과정에서 확립된 이유는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 전체 구성원들에게 유익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라고 해서 그 원칙에서 제외될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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