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조순칼럼
원래 미국의 대북 정책의 핵심은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핵 포기였고 장기적으로는 북한 정권의 붕괴 촉진이었다. 시간은 미국 편에 있다고 보고,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거부한 채, 6자 회담으로 시간을 벌면서 경제 제재로 북한의 숨통을 누르고자 했다.
그런데, 아! 웬일인가. 미국은 이 모든 것을 다 포기했다. 북한과는 직접교섭을 하지 않겠다던 태도도 바뀌었고, 북한 정권의 존속을 인정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2월13일 6자 회담의 핵심이 이것이었다.
이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이 취한 대북 전략, 그리고 아시아 전략의 가장 획기적인 변화이며, 북한은 물론 한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 자체에도 심장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은 북한에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폐쇄(동결도 아니고 폐기도 아님)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들일 것, 둘째, 앞으로 핵개발 계획의 내용을 국제기관에 보고하라는 것이다. 북한이 이 조건을 이행한다면, 미국은 지금 보유한 핵이야 어찌 되든 북한과 외교관계도 맺고 또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뺄 수 있다고 했다.
미국과의 국교 수립이 숙원인 북한은 호기를 잃을세라 당장 이 조건을 수용하고, 즉시 국제원자력기구의 검사를 받고 싶다는 의사표명을 했다. 그리고 6자 회담의 김계관 대표를 미국에 파견해 합의실천에 관한 실무협의를 추진했다. 미국은 김 대표를 거의 국빈으로 대우했다.
사사건건 대립과 갈등을 빚어온 북한과 미국이 갑작스레 밀월관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북한과 미국은 산전수전 다 겪은 맞수다. 쌍방간 어떤 이해관계의 일치가 있는가?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은 미국 세계전략의 변화를 함축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네오콘’ 전략을 탈피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최근 대중국 전략의 현실화, 이라크 전쟁 실패의 사후 처리, 이란·시리아와의 관계 재정립, 남미와의 관계 복원 등 세계 전략의 틀을 바꾸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민주주의를 ‘수출’하려 해도 잘 안 되고, 이란 및 시리아와도 마주앉아야 하는 판이다. 체면 손상이라는 약간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지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핵 개발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포기’할 것을 약속하지도 않은 채, 대미관계를 개선시킴으로써 일약 ‘악의 축’이 ‘평화공존의 축’으로 탈바꿈하고, 정권의 존재가 확보된데다 큰소리치면서 경제원조를 요구할 수 있게 됐다. 대박이 터진 것이다. 미국과 북한은 지금까지는 동상이몽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이상동몽이 됐다.
북-미 합의가 앞으로 잘 ‘실천’될지는 아직 확실하진 않다. 그러나 쌍방이 다 그 성공을 바라는 한 어느 정도 성과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남한의 처지인데, 한마디로 대단히 복잡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남한의 정치·외교·안보 및 경제운용 패러다임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경제에 관해선, 상당한 원조 부담을 떠맡게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과 중국 사이의 샌드위치가 아니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덫에 걸리고 꼭 자발적이지도 않은 대북원조 부담에 치이면서 가뜩이나 어려워지는 살림에 국민의 허리가 휠 것이다. 남의 그늘에서 살던 나라는 그 그늘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슈퍼파워의 그늘에도 공짜는 없다. 남의 덕을 보자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북-미 관계 변화의 교훈이다.
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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