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기어코 과거로 되돌아가는가 / 한상희

등록 2007-03-22 18:35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
세상읽기
또 집시법이다. “도둑맞으려니 개도 안 짖더라”는 대통령의 말은 비겁한 책임전가일 뿐이다. 도둑을 부른 것은 침묵이 아니라 그 침묵을 강요한 국가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폭력은 어김없이 집시법에서부터 시작한다.

군사정권 시절 닭장차와 최루탄과 백골단을 만들어 냈던 바로 그 집시법이 이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첨병이 되어 또다시 우리의 함성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이 유구한 집시법은 경찰에 막연한 교통지체 가능성을 빌미로 집회를 불법으로 처단하고 경찰봉과 방패로써 그 참가자를 즉결심판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한다. 이런 집시법이 있기에 법원은 긴급조치 판결 공개라는 수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이 제출한 교통량 통계만으로 “집회금지처분은 합법”이라는 자동판매기식 판결을 내밀 수 있게 된다.

이 금지처분이나 합법판결에는 정말 ‘아무 이유 없다’. 민주정치의 핵심이 되는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우리 경찰이나 법원은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냥 대중집회는 교통불편을 야기할 수 있기에 금지하며, 경찰이 그렇다고 하니 법원은 그대로 금지처분을 합법이라 한다.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그 애절한 외침에도 귀 막을 수 있는 당당함, 도로는 차도와 인도로 구분된다는 도로교통법의 규정은 알아도 다중이 왕래하는 공공장소에서의 집회와 시위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는 헌법원리는 알지 못하는 단편적 사고력, 이것이 군사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제정된 집시법 45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조건반사적 군상이다.

그러기에 이 개인주의의 시대에 3만명이나 모이는 집회라면 바로 그 인원수만으로도 교통지체는 감수되어야 한다는 한 변호사의 말은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3만명의 군중이 모일 만큼 국민적 관심을 끄는 사안이라면 교통을 이유로 금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통을 차단하고서라도 이들이 말할 수 있게 하고 또 생방송을 해서라도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과거사를 반성하는 우리 법원이 내려야 할 판단이다. 그것이 6월 민중항쟁의 교훈을 되새길 줄 아는 우리 경찰이 할 일이다.

하지만, 소비자 보호를 위한 방송광고 심의규정조차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광고의 방송을 막는 수단으로 왜곡되는 이 정권 체제에서, 집시법은 듣기 싫은 반대의 목소리를 가장 손쉽게 막아주기에 그 위세는 여전히 등등하다. 지난 10일의 집회를 불법으로 선언한 이 법은 서울 도심 길거리에 모일 수만명의 대중들을 ‘떼법’이나 쓰는 막무가내 억지꾼으로 매도하면서 이제 다가오는 25일의 집회까지도 불법으로 규정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 목소리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수많은 정치권력을 뚫고 대중이 목청껏 소리칠 수 있는 유일한 정치공간인 길거리를 빼앗긴 그들은 이제 더 이상의 발언조차도 힘겹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자랑하고 87년 체제조차 어슬픈 개량이라 비판하는 이 민주화의 시대에, 정작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비판하고 그 협상 중단을 외칠 수 있는 통로는 초췌한 홈페이지 하나에 멈추어져 있고, 애써 도둑을 외면하는 정치권력을 향해 힘겹게라도 항변할 수 있는 공간은 이제 광화문 네 거리 조그만 돗자리 위 차가운 바람자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솔로몬의 경구처럼 역사는 반복된다. 특히, 기억되지 못하는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집시법을 부둥켜안고 반대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우리는 옛날의 군사정권과 다르다고 외치는 자기 기만성 변명은 무의미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과거를 망각하고 나만은 다르다고 자만하는 자에게 축복은 없는 법이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